한줄 詩

소보로빵 - 김옥종

마루안 2020. 8. 11. 19:27

 

 

소보로빵 - 김옥종


공사장 철제 사다리 위에서 떨어져
뇌를 다쳤다던 영광 아재는 새벽 두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소보로 빵을 뜯어 잡수신다
보름 동안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나는 부시럭거림과 동시에 튀어 오르는
아픈 냄새가 반대편 병상에서 화투패처럼 날아오면
그제서야 살고 싶어졌다
아니 빵을 먹고 싶어졌다
아재는 세 번째 봉지를 마저 뜯어 배가 불러오고
내 배는 늑막까지 복수로 차올랐다
아재는 살기 위해 먹지만
나는 먹기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
뇌가 차갑게 인식하면
생이 뜨겁게 반응한다
밤새 창문에 쏟아 붓던 수액이 폐를 적시고
호랑이 장가가는 비가 내려
묵은 먼지가
아침 햇살 사이로 날아오르면
구름이 만들어놓은
부스러기 곰보빵과 생크림 사이 딸기 얹은
소보로와 조청 묻힌 쑥꿀레가
봄볕에 버짐처럼 혈관을 타고 번져 가면
빵을 먹고 싶어졌다
그제서야 살고 싶어졌다


*시집/ 민어의 노래/ 휴먼앤북스

 

 

 

 

 

 

노가다 - 김옥종


생의 부표를 띄워 매달아 놓은 그물을 유실하고
새벽별 가지런히 돌아갈 때까지
손톱이 갈라지도록 무덤 주위를 더듬다가
해무 사이로 쩍이 붙어 몰골을 알아볼 수 없는
유물 하나 건져내어 회항 하던 길의 함바집에서는
이승의 사랑은 한번으로도
부족하지 않을 듯 싶은 송씨 할배
돌아오는 장에는 오빠가 삘그작작 헌 놈으로
속옷 한 벌 사주겠다던 맹세도 부질없음을
영광집 할매는 그리 자주 잊을까나
공사장 사무실 옆 창고
시린 이월의 모퉁이에서 선풍기를 훔쳐가는
그의 뒷모습으로 낯선 여름을 보았다
세한의 다음 여름을 걱정하는 할배의 고단함이
하얀 눈밭을 만들고
그의 부고장이 날아왔을 때
어설프게 삭힌 홍어와
남겨진 코다리찜에 얼큰해진 영광집 할매는
다음 장에는 꼭 사올 거라고,
찐한 키스 한번 못 해주었노라고
설은 눈물에
리어커만 타본 양반이
꽃상여 타서 좋겠노라고
술잔 깊이
세월의 앙금만 켜켜이 쌓아올릴 때
해안가를 범람하던 영혼 하나
무거운 짐 내려놓고
바다로 돌아갔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픈 영화 - 이철수  (0) 2020.08.12
보험은 말씀처럼 - 정병근  (0) 2020.08.11
날씨는 먹구름을 발표하고 - 김대호  (0) 2020.08.11
침침하다 - 정덕재  (0) 2020.08.10
멈춰선 돌멩이 - 이학성  (0) 2020.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