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맨드라미 - 박춘희

마루안 2020. 7. 30. 21:56

 

 

맨드라미 - 박춘희

 

 

처음부터

빨갛게 끓어오르진 않았다.

 

빈집

우체통 곁에

함께

눈비 맞고 오래 기다려 주다가

 

날이 갈수록

날 선 독촉장에

속을 있는 대로 끓였다지.

 

그 여름

죽은 목소리를 뒤집어쓰고

끙끙 앓았단다.

 

수위를 넘긴 우체통

언제부터 수취 불능 상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할 때쯤

 

맨드라미 껴안고 악을 쓰다가

독기 빠진 글자들

씨앗으로 콕콕 박혔단다.

 

죽은 편지를 들고

조문조차 꿈꿀 수 없었던 그해 여름

 

수취 불능을 끄고

 

맨드라미

천천히 죽어 갔다.

 

 

*시집/ 천 마리의 양들이 구름으로 몰려온다면/ 파란출판

 

 

 

 

 

 

감정의 바깥 2 - 박춘희

 

 

칠월 땡볕

끈질기에 꼬이는 파리 떼

 

누군가에게 사체는

구멍마다 알을 슬어 놓는

아늑한 자궁이 되기도 하는데

 

몸을 얻는 것은 언제나 삶의 문제인데

 

파리의 일생이나 개의 일생이나

사람의 일생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

 

개의 전생이란, 긴 시간도 짧은 시간도 아닌데

한 종이 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한데

 

담장 바깥,

뭉텅뭉텅 털갈이하듯

늙어 지친 꽃들

 

개의 일생이 얹혀

동공 속으로 간신히 졌을,

 

발을 놓쳐 버린 어둠이

개떼처럼 떠돌다 마침내

 

저 구멍마다 고인

꽃향기를 틀어막고

 

구더기 떼 새까맣게

꾸역꾸역 쏟아 내던

 

 

*몸을 얻는 것은 언제나 삶의 문제인데: 이현승, <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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