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탈상 - 강민영

마루안 2020. 7. 29. 22:31

 

 

탈상 - 강민영


마지막에 지우는 건 흔적
아니면
불판에서 오그라드는 돼지 껍질

짝이 없는 저고리에 불을 놓자
진저리치듯
뒤틀며 오그라든다
싸구려 천 냄새가 시큼하다

옷장 틈에서 굴러 나온
돌돌 말린 양말
껍데기 안에 또 하나의 껍데기

우리는 어쩌면 껍데기만 지우는지도 몰라
아직도 양말은 발의 체온을 기억할까

발톱에 걸린 실밥이 풀려나와 있다
돌돌 말린 퀴퀴한 냄새가 달아날까
조심스레 주머니에 담는다

평생 아버지의 얼룩을 지우며
허리가 구부러지는 것도 모르던
어머니에게는 이제
걸레를 내려놓고 곧게 펼 몸이 없다

한 번씩 떨어지는 기름 덩어리에
불길이 훅, 하고 올라갈 때마다
눈동자가 붉어졌다가 내려가는 식탁
상속(相續)에 침을 삼키는 식욕들이
하나둘, 불판 앞으로 모여든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소문 - 강민영


아버지의 죽음을 신문에서 읽었다. '전역한 술 취한 해군 대령, 길에서 동사' 오빠는 친구를 불러 삽을 들고 나갔고 언니는 내가 울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다. 내게 아버지는 좋은 포장지였을 뿐이다. 포장지가 찢어져 우리의 몸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머니는 알몸으로 신문에 실렸다. 어머니에게는 치부를 가리기에 턱없이 작은 손바닥만 있었다. '두 명의 부인, 객사자 시신 쟁탈전' 어머니는 시앗에게 기와집을 빼앗겼을 때보다 신문을 보며 더 분노했다. 죽은 뒤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와 걸핏하면 남자를 버렸던 언니 그리고 만화방 구석에 앉아 연탄가스를 마시던 나를 위해 어머니는 예배당에 우리의 학비를 헌금했다. 더는 팔아먹을 것이 없자 창고를 뒤지던 오빠가 찾은 아버지의 낡은 노트에는 신문처럼 반듯한 글씨가 선명했다. '배신자, 나는 부모에게 총을 겨눈 후레자식' 북에 있는 할머니를 향해 총을 들이댄 아버지, 전쟁이 끝나자 미쳐버린 남자들의 소문이 마을에 떠돌았다. 신문에 더 이상 우리의 이야기는 없었다. 몇 명의 예쁜 여자들의 벗은 몸매와 그들의 연애 소식뿐이었다.


 

 

*시인의 말

몽골에서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유목민을 만났다. 노인은 자신의 주름을 자연이 내려 준 선물이라고 했다. 노인의 갈라진 목소리에서 마른바람 소리가 들렸다. 노인의 작은 몸으로 버텨온 사막의 바람이 그 골짜기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그 노인처럼 극적이진 않지만 내게도 다가온 한파를 묵묵히 견뎌낸 흔적이 있다면 그것은 이 시집일 것이다. 
이제 이 시집이 땡볕에 작은 그늘을 드리운다. 자연에게 또 한차례 신세를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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