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 - 박서영

마루안 2020. 7. 28. 19:30

 

 

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 - 박서영

 

 

담벼락 밑에 웅크리고 앉은 노숙자의 발끝에서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붉은 장미꽃 그늘 아래 발끝을 모으고 앉아 있는 고양이는
공기의 도축을 이미 알아차렸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은 토막 난 장미의 거친 숨결
첫 번째 죽음의 매혹을 기록하는 일이다


육체와 그림자를 분리하기 위하여 바람은 한동안 끙끙거렸다
냄새와 울음이 동시에 바람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 담벼락을 스쳐 지나온 사람
기록들을 정리할 때 그곳에 두고 온 그림자에 대해 생각한다
내 그림자는 아직도 나에게 오고 있는 중이다


노숙자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태어나고 있다
발뒤꿈치엔 둥근 파문이 화석처럼 굳어진 지 오래고
그는 담벼락 밑에 앉아 햇볕을 쬐는 시체
나는 공기의 도축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그 풍경을 빠져나왔다
시체의 마음속으로 장미꽃잎 하나가 침몰하고 있다


담벼락 위 고양이는 모든 것을 알아챈 눈빛
여름 저녁의 입구에 조등처럼 별 몇 개가 반짝반짝
나는 아직 당신을 외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시집/ 좋은 구름/ 실천문학사

 

 

 

 

 

 

대궁밥 - 박서영

 

 

버려진 밥과 남겨진 밥 사이에서

마음 서성거려본 적 있는가

 

사무실 입구마다 점심 먹은 그릇들 가득하다

포개진 채, 엎어진 채, 애틋하게

나무젓가락들이 빈 그릇마다 꽂혀 있다

노인은 그릇 옆에 철퍼덕 앉더니

나무젓가락을 휘휘 젓기 시작한다

두만강 푸른 물에 떠가는 돛배처럼

빈 그릇들이 허공의 야윈 물살을 가른다

뱃사공처럼 노련한 솜씨로 노를 젓는 노인

암초를 피해

흰 면발들을 건져 후루룩 입안에 넣는다

누군가 버린 밥이 저 노인에겐 남겨진 밥이다

늙은 뱃사공 입가에 흘러내린 붉은 국물을 쓰윽 닦고

단무지 하나를 손으로 집어 먹는다

먼 항해를 다녀오는 길인가

밑창이 쩍쩍 벌어진 구두와 때 절은 낡은 외투

어디까지 흘러가려는 건지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같이

노인은 절룩절룩 사라지고

 

얼굴 포갠 빈 그릇들이 허기의 체온을 달랜다

둥둥 그 위에 날파리 몇 마리

더러는 붉은 국물에 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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