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름의 방향 - 박수서

마루안 2020. 7. 28. 19:12

 

 

구름의 방향 - 박수서


세월과 시절을 잡아둘 수 없지만,
제트기가 지나가고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똥줄처럼
공중에서 산산조각 나버리지만,
흔적은 가슴에 박무처럼 머물고
새총처럼 허공에 포물선을 긋는다

영원히 갈 수 없는 나라를 생각하는 날은
유효기간이 지난 여권을 펼쳐보듯 그리움의 얼룩이 졌고
내내 한 곳만 보고 있자니 눈 밖으로 사라져버렸고
끝내 저 하늘 어디로 갔는지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게 하늘의 조화 때문은 아닐 것이니

저 하늘 어디라도 구름은 있을 것인데 그저
허투로 바라보다 놓쳐버렸거나
고개 들어 한번 망연하게라도 올려보지 못함이라
풍향계처럼 수직의 축을 가슴에 꽂고
바람의 방향으로 톱니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하여도 정확히 방향을 읽지 못한다면,
먼저 나를 관측하고 옳게 조율된 깃의 방향에 기대야 할 것이다


*시집/ 갱년기 영애씨/ 북인


 

 



멀리 있는 그대가 내 옆에 함께 앉아 있는 날은 - 박수서


눈이 오면 모르는 흰 발자국이 따라오고
비 내리면 멀쩡한 우산이 구두코 앞에 버려지고
바람 부는 날은 풍향의 반대쪽 창문이 자꾸 흔들리고
꽃피는 날은 서럽다고 훌쩍훌쩍 울다,
불현듯 냉정해진 꽃샘추위처럼
가만가만 내 심장을 떡잎처럼 찢는 날
멀건 눈물이 흐르는 이유는 뭐냐
밥이라도 챙겨줘야 할 어린 자식처럼
쓸쓸하고 아득한 이유는 뭐냐
자장자장 죽어버린 사랑아
그대여, 어서어서 놋그릇 가득 꽃밥으로 비벼져
비린 그리움을 다 떠먹이고 꽃길로 가라
멀리 있는 그대가 내 옆에 함께 앉아 있는 날
더는 못 견디게 그립지 않은 날
날카로운 도끼에 벌목되고,
밑동까지 베인 날



 

*시인의 말

여섯 번째 집이다.
집을 짓는 일보다, 집 안팎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다.
나에게서 안전하지 못해 홀연 떠나버린 빈집도 몇 채,

부디 해풍에도 무사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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