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신발 베고 자는 사람 - 유홍준

마루안 2020. 7. 28. 19:08

 

 

신발 베고 자는 사람 - 유홍준


아직 짓고 있는 집이다
신축 공사 현장이다
점심 먹고 돌아 온 인부들 제각각 흩어져 낮잠 잘 준비를 한다
누구는 스티로폼을 깔고 누구는 합판을 깔고 누구는 맨바닥에 누워
짧고 달콤한 잠의 세계로 빠져 들어갈 준비를 한다
신발 포개 베고 자는 사람은 신발 냄새를 맡는다
웃옷 돌돌 말아 베고 자는 사람은 웃옷 냄새를 맡는다
딱딱한 각목 동가리를 베고 자는 사람은
딱딱한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찌그러지든 말든
상관없는
신발 두 짝을 포개 베고 자는 사람은 생각한다
버려야 할 것과 새로 사야 할 것들 이제는 다 옛일이 되어버린 것들을 생각한다
(사실은 아무 생각도 안 한다)
아직 문짝이 끼워지지 않은 집은 시원하다
시원하다는 것은 막히지 않았다는 거다
세상 모든 집은 완공되기 전에 인부들이 먼저 잠을 자본 집이다


*시집/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문학의전당


 

 



천령 - 유홍준


개오동나무 꽃이 피어 있었다
죽기 살기로 꽃을 피워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 꽃이 피어 있었다
천령 고개 아래 노인은 그 나무 아래 누런소를 매어놓고 있었다
일평생 매여 있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안 태어나도 될 걸 태어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육손이가 살고 있었다
언청이가 살고 있었다
그 고개 밑에 불구를 자식으로 둔 애비 에미가 살고 있었다
그 자식한테 두들겨 맞으며 사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개오동나무 꽃이
그 고개 아래
안 피어도 될 걸 피어 있었다




# 유홍준 시인은 1962년 경남 산청 출생으로 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상가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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