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 이소연 시집

마루안 2020. 7. 20. 21:56

 

 

 

두 명의 우주 비행사가 뽑혀 우주비행 훈련을 위해 러시아로 떠났다. 우주선에 오를 순서는 남자가 먼저였다. 여자는 후보 우주인으로 남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리를 메우는 대타였다. 남자 후보는 훈련 중에 시만 읽다가 우주선에 오를 자격을 잃었다.

후보였던 여자가 우주선에 올랐다. 우주선에서 내려다 본 지구는 정말 아름다웠다. 지구로 귀환 중에 여자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귀환 이후 더 단단한 우주인이 되겠다는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우주인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걸었다. 그래도 그녀가 우주인였음은 변함이 없다.

이 시집을 읽다가 문득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이 생각났다. 우주선을 타기 전부터 이소연에게 호감이 갔다. 공부 많이 하는 연구원이 소심하고 자기 표현이 서툰데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했다. 이런저런 논란에도 소신 발언을 할 줄 아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갖고 나온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에도 소신 있는 문장이 마음에 든다. 시집 앞 부분에 자리한 <철> 시리즈 몇 편을 읽으면서 이 시인 참 시를 잘 쓴다는 직감이 왔다. 시집 전부를 읽고 나서 그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시인 이소연은 시를 잘 쓴다. 1983년 포항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14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켬'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이 간략하면서도 명징한 약력이 그녀의 시집에 더욱 신뢰감을 준다.

거창한 대학이나 유명 매체를 통한 등단이 궁금한 게 아니다. 소박한 이력이라도 기본적인 작가의 약력은 독자에 대한 최소 예의다. 생산연도는 물론 생산지도 밝히지 않은 작가의 약력을 볼 때면 꼭 마트에서 식품 성분과 유통기한이 지워진 제품을 마주한 기분이다.

이소연의 시는 요즘 유행하는 달착지근하고 말랑말랑한 시와는 다르다. 다소 거칠어서 불편할 수도 있다. 정액과 생리혈이 묻은 흰 도화지를 마주한 느낌이랄까. 아니면 그걸 닦은 하얀 속옷을 누군가가 불쑥 내민 기분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도 이소연의 시는 진공 청소기처럼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인력과 함께 묘한 중독성이 있다. 어디까지가 시인의 경험인지 알 수 없으나 상처를 보듬거나 파헤친 문장이 낙지 빨판처럼 눈과 입에 척척 감긴다. 부조리한 삶이어서 더욱 살고 싶어진다.

해석할 여지는 한 방향이나 여러 개로 중첩된 은유로 감싼 싯구가 서늘하게 다가와 같은 시를 반복해서 읽게 한다. 무얼 말 하는지 맛을 알 수 있는 시다. 시인은 많으나 이런 시는 드물다. 세상엔 하나마나한 문장으로 뜬구름을 잡는 시가 얼마나 많은가.

인간이 아무리 지성을 가진 고등 동물이라 우아 떨어도 얼마나 많은 위선과 추함을 뒷편에 감추고 사는가. 밤새 포르노 영상을 보고도 아침이면 멋진 넥타이를 매고 출근을 한다. 꽃도 찻잔 위에 떨어지면 고상하지만 개똥 위에 떨어지면 오물이다.

모처럼 시적 내공이 탄탄하고 자기 색깔이 분명한 젊은 시인의 탄생이 무지 반갑다. 재능 있는 시인을 알아 보고 시집을 낸 출판사의 혜안에도 박수를 보낸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작품을 기다리겠다. 지금 두 번째 우주인을 모집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