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분꽃 - 김왕노

마루안 2020. 7. 19. 18:55

 

 

분꽃 - 김왕노

 

 

나는 분꽃을 할머니꽃이라 부른다.
봉투에 할머니꽃이라 쓰고 해마다 서랍에 갈무리해 두면
다음 해에 마당에서 담 밑으로 동네 경로당 앞으로
할머니 걸음걸이로 한 발 한 발 걸어 나가서 핀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을 때면 서랍의 분꽃 씨앗에서 할머니 숨소리가
웃음소리가 후렴구처럼 살아나 내 겨울 독서는 즐거웠다.
손녀를 치장해 주듯 각색의 꽃으로 세상을 곱게 치장해 주는 할머니 마음
겨울 깊어도 서랍 속에서 까만 씨앗으로 잠들어 있었다.
여름 내내 그 많이 피었던 꽃을 지우산처럼 안으로 접고
캄캄한 서랍 속에 곤히 잠든 할머니 꽃씨 분꽃 씨
생각만 해도 볍씨 몇 말 잘 갈무리해 둔 것같이 마음이 넉넉해졌다.
할머니 돌아가신 지 이젠 아득하나
올해도 할머니 모습이 건강하게 분꽃으로 송이송이 피는 여름이 왔다.


할머니 파안대소가 해마다 분꽃으로 피어나 세상을 밝히므로
여름 한철은 장마도 어둡거나 눅눅하지 않고 밝았으며
지금은 조금 지친 것 같지만 씨앗으로 잘 여물어있다.
나는 할머니 마음이 한 톨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봉투 안에 넣는다.
가끔 한 톨만 입에 넣고 물과 마시면
내 꿈속 분꽃 한 그루 고목처럼 자라리라 생각한다.

 


*시집/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천년의시작

 

 

 

 

 

 

낙과 - 김왕노

 

 

한때 떫었다는 것은
네게도 엄연히 꽃 시절이 있었다는 것
네가 환희로 꽃 필 때 꽃 피지 못한 것이
어디나 있어 너만 영광스러웠던 것
너를 익히려 속까지 들어차는 햇살에
한때 고통으로 전율했다는 것
익지 않고 떨어진 낙과를 본다
숱한 네 꿈을 꼭지째 뚝 따버린 것이
미친 돌개바람 탓이기도 하지만
꼭지가 견디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진 과욕의 무게 때문
한때 나도 너와 같은 푸른 낙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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