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무에 걸린 은유 - 전영관

마루안 2020. 7. 18. 22:20

 

 

나무에 걸린 은유 - 전영관


내 안의 꽃이 다 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꽃이 보인다

만발해 너울거리는 자태보다
찬바람에 떨어져 낡아가는 꽃잎들이 먼저 보인다

하, 저 꽃잎들은

어미를 잃고 헤맨 어린것의 발뒤꿈치
저를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한 청춘
이별을 참다가 뛰쳐나와 진흙 묻힌 버선
바람같이 근본도 없는 것들하고 섞이느라
평생이 한나절인 듯 녹슬어버린 몸
사랑 따위에 발목 잡혀 승천하지 못한 선녀들의 군무
왕자나 기다리는 신데렐라들의 순은 구두
죽을만큼 나른한 저승의 봄을 옮기는 나비 날개
하늘을 연모한 까닭에 나무에 피어난 수련(睡蓮)
삼천배 앞에 미소 짓는 애기보살의 무릎
세상에서 하나뿐인 백옥을 캐다 스러진 광부의 아내
거문고 없이 앉아만 있어도 취하는 기생 손목
이마에 붙이면 지옥도 면하는 부적
보름이면 달빛을 음미하는 신의 숟가락
전생을 돌고 돌아온 저 하뭇한 숭어리들을
목련이라 감탄하겠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요양 - 전영관


섬에서 일 년만 살아보자던 약속을 했었다

바람이 통성명할 틈도 없이
반대편으로 건너갈 만큼의 조각섬이 좋겠다

부엌살림 트고 지내는 마을에서
면식은 불편한 생필품
아무도 모르게 축대 높은 집을 골랐다

우리는 시간에 흔들려도 떠밀리지 않는 해조류로 요양하겠지
당신은 아침마다 마당에 그득한 해무를 사발로 퍼내어
청포묵 무침을 내놓는 마법을 부리고
우리 고래 뱃속에 손잡고 누운 듯
어둠과 적막을 오래 살던 집으로 착각하곤 하겠지

항우울제 탓에 뜬금없는 내 말마다 자상하게 답해주는

당신 미소는 언제나 간이 맞았지

파도 소리는 등으로 들으면 서러운 것 같은데
해변 가까이 앉으면 보채는 소리로 들린다

바다에서 몸피를 키운 어둠은
뭍이 어색한 듯 고샅을 몰려 다닌다

희망은 조각섬의 자생종

몸이 우선해지고 일 년 살림을 정리할 때가 되겠지
다짐 비슷한 습성을 들이겠지

욕심껏 청춘을 양식하겠지

 

 

 

# 전영관 시인은 충남 청양 출생으로 2011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람의 전입신고>,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슬픔도 태도가 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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