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벼락 새비 젓 - 김옥종

마루안 2020. 7. 16. 22:26

 

 

벼락 새비 젓 - 김옥종


이제서야
당신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슬픔이 슬픔을 위로할 때는
안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의 생채기가 맞닿아서
덧나기 때문입니다
슬픔이 슬픔에게 다가서고자 할 때는
생채기의 반대편을 날이 선 칼로 베어낸 선혈로
가만히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곤히 잠든
당신의 이른 새벽에
동부콩을 넣어 냄비 밥을 짓습니다
토하젓은 없어
별들을 향해 튀어 오르던
징거미 새우를 데치고
쪽파와 달래와 다진 마늘과 간장과
고춧가루로
벼락같이 무쳐낸 새비 젓에서는
당신의 쇄골에서 나던 향유고래의 냄새가 납니다

인연이 저물고
나의 사랑이 발효되지 못하고
골마지 낀 채로 잠들어버린
막걸리 식초처럼 허망한 새벽에
첫 닭이 울기 전
쇠구슬같이 내리는 이슬을 어깨로
받아내며 돌아오는 길에 묻습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당신을 짓고
허물어 내야
봄이 오는 것인가요


*시집/ 민어의 노래/ 휴먼앤북스

 

 

 

 

 

 

민어의 노래 - 김옥종


고사리 장마가 지나고 난 바닷길
깊게 패인 여울물 소리에 새우떼의 선잠을 깨우는
밴댕이와 알 품은 병어들의 놀이터가 돼버린 전장포 앞바다에서는
서남쪽 흑산해에서 진달래꽃 피기를 기다렸다가
뻘물 드리우는 사리물 때를 기다려
뿌우욱 뿌우욱 부레로 내는 속울음으로
내 고달픈,
고향에 다다른 칠월의 갯내음을 아가미로 훑는다

마늘 뽑고 양파 캐어 말리던 늦은 오후,
구년은 자랐을법한 일 미터의 십키로짜리 숫치를 토방에 눕히고
추렴하여 내온 병쓰메*에 네 등살은 막장에 얹어 먹고
목살은 묵은지에 감아먹고 늙은 오이짠지는 볼 살에 얹어 먹고
고추 참기름 장에는 부레와 갯무래기 뱃살을 적셔먹고
갈비뼈와 등지느러미 살은 잘게 조사서
가는 소금으로 엮어내는 뼈다짐으로 먹어도 좋고
내장과 간은 데쳐서 젓새우 고추장에 볶아내고
쓸개는 어혈이 많아 어깨가 쳐진 친구에게 내어주고
아랫 턱 위에 붙어있는 입술 살은 두 점 밖에 안 나오니
내가 먹어도 될 성 싶은
깊은 고랑 주름살에도 꼬리뼈 살을 긁적거리고 있노라면
봉굴수리잡* 옆의 대실 개복숭아는 제법 엉덩이가 빨갛다

세월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것,
민어 몇 마리 돌아왔다고 기다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새우 놀던 모래밭을 파헤쳐
집 지을 때부터 플랑크톤이 없던 모래밭에
새끼를 품어 내지 못한 오젓, 육젓이 밴뎅이를 울리고
깡다리를 울리고
병어를 울리고
네 입맛 다실 갯지렁이도 없는 바다에 올라 칼끝에 노래하던
민어의 복숭아 빛 속살은 다시 볼 수 없으리라


*병쓰메: 2홉짜리 작은 소주. 일본말 빙즈메(瓶詰)에서 온 말.
*봉굴수리잡: 봉굴저수지 옆에 있었던 수리조합의 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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