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만히 맥박처럼 짚어보는 누군가 - 손택수

마루안 2020. 7. 16. 22:16

 

 

가만히 맥박처럼 짚어보는 누군가 - 손택수 


누군가 오고 있다 내가 모를 누군가 
지나온 거리에서, 잊어버린 여름 강변에서, 
더는 가지 않는 메타세쿼이아 숲을 지나, 
귀에 익은 걸음으로 오고 있다 
연못을 치는 빗소리, 웅덩이를 물고기 등처럼 
가르고 지나가는 자전거 바퀴 소리, 
누군가, 이름도 잊어버린 누군가 
먼바다 미진처럼 나의 창을 흔들고 있다 
거리에서 잠시 부딪친 눈빛, 어디서 보았더라 
인파에 떠밀려 돌아선 등, 아는 얼굴인데 
만난 적 없는 누군가, 몰라도 알 것 같은 얼굴로 
먼산 쪽으로 고개를 빼고 있으면 
내 안에서 더 분명해지는 소리 
오고 있다 누군가 누군가가 되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 
강을 건너오고 있다 휑한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아파트 현관 앞 자동 점멸등을 깜박이고 있다 
나가보면 아무도 없고 그저 허하기만 해서 
가만히 맥박처럼 짚어보는 누군가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애월 - 손택수


하늘을 본뜬 모음
아래아다
훈민정음 해례본 속에 남아 있고
소리는 사라졌다
뭍에서는 사라진 중세의 모음을
여전히
쓰고 있는 바다
지명에 달을 단 건
비록 지는 것이 운명이라 하더라도,
달이 뜨고 지는 소리나마
갑골문으로 삼아보자는 뜻
애월은 지지 않는다
이름 속 벼랑에 늘 달이 걸려 있다
누가 그것을 헛되다 할 것인가
애월에선 뒹구는 돌 하나도 달의 자녀여서
나무들도 새들도 저마다의 성대 속에
달빛이 묻어 있어서
헛된 것이 이름이라면,
헛됨의 지극함으로
찾아가는 바다
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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