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걷는 사람 - 우남정

마루안 2020. 7. 7. 22:33

 

 

걷는 사람 - 우남정


저기,
그 사람이 온다
두 손을 다른 높낮이로 흔들며 초로의 사내는 필사적이다

해를 바라보고 걷다가 사선으로 걷다가 문득, 역광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어망에 갓 잡힌 물고기처럼 걷는다 두 발이 각각의 각도로 걷는다 걸으려는 사람과 버티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 걷는다 허우적거리는 사람과 춤추는 사람이 함께 걷는다 날개를 말리는 새처럼 우두커니
걷는다

낙뢰가 칼날로 내리친 밤
절개지처럼 무너져 내린 길을
그는 얼마나 오래 걸어온 것일까

기척이 없던 벽조목에 까치 한 마리 울다 간다
너의 왼발과 나의 오른발을 묶고 뛰던 유년의 풍경이 스쳐간다
수직으로 솟는 도시가 지나간다
엇박자 나는
무수한 아침이 걸어간다
하낫! 하낫!

그는 넘어질 듯 일어서며 수평을 흔들고 있다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줌(zoom) - 우남정


횡단보도 저쪽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 낯익다
나를 지나쳐 빠르게 카운트다운 하는 신호등을 바라본다
어디서 스친 적이 있나
끌어당긴 그의 잔상을 인파에 놓쳐버렸다

다가온 것이 흔들리다 또렷해질 때
나비의 발자국이 머문 꽃술, 꽃받침의 솜털까지
소름 돋는 섬세한 표정
한 장의 세밀화에 음영陰影이 깊어지는,
숨 막히는 매혹이다

찰칵! 꽃 하나
사각의 프레임 속에 갇히고, 그예
끌려간 탄력만큼 천천히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눈동자
한 발짝 한 발짝 초점 흔들리며 꽃이 번진다

내게 왔던 것들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

내 안의 수많은 뷰파인더를 뒤적거리다
희미해지는 그림자를 오래 지켜보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쯤
흐린 배경을 뒤로하고 홀연 도드라져 빛나는 피사체
진경은 적막한 심상에 맺히는지
나는 서둘러 그 순간을 박제하는 것이다

행성들이 운행을 계속하며 다가왔다 멀어져 가고
누군가는 천년을 돌다 부딪쳐 불꽃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나는 아득한 거리에서 오고 있는 풍경을 기다리며
가뭇하게 지평선 끝으로 사라지는 너를
막 배웅하는 중이다


 

 

*시인의 말

낡은 턴테이블에서
머뭇거림 같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파르르 웃고 있는 튤립나무 이파리들
블랙이 따뜻하다

화농을 뽑아낸 고약 같은
에스프레소

이윽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흐린 날에 갇혀 - 윤의섭  (0) 2020.07.08
그 곳 - 김윤배  (0) 2020.07.08
다정한 죽음 - 정병근  (0) 2020.07.03
들꽃 - 이우근  (0) 2020.07.03
마네킹의 법칙 - 천융희  (0) 2020.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