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네킹의 법칙 - 천융희

마루안 2020. 7. 2. 19:32

 

 

마네킹의 법칙 - 천융희


몇 달째 부동자세인 텅 빈 점포

창고 대 방출을 거쳐
막다른 고별세일에 다다르면
결국 옷을 벗을 수밖에 없는 마네킹의 법칙이 있다

최후의 각도로
끝까지 버티고 있는 환한 침묵

차마 접지 못하는 저들의 표정을 보라

머리 팔다리며 허리
결국, 분해되어 뒤엉킨 채 트럭에 실려 나가는
그들의 시간이 도래한다

쇼윈도에 나붙은 임대가 가까스로 성립되면
일손을 갈아 끼우고
또 다른 각도를 꿈꾸는 그들의 세계

사지 멀쩡한 저들끼리 뭉쳐 웅성거리는

아예 길가로 내몰린 마네킹들 사이로
어렴풋이 사라지는 사람들

그인지 저인지 알 길이 없는


*시집/ 스윙바이/ 한국문연



 

 

 

달의 폐곡선 - 천융희


말하자면 밤의 척추처럼
주상복합 아파트를 돌며 점점 커지는 붉은 몸뚱어리

최저시급을 수거하는 그의 직무는
무분별하게 유출된 대형마트 카트를 운반하는 일이다

연결고리를 중심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어제와 오늘

수십 개 발이 일제히 바닥을 굴린다
어긋나게 놓인 보도블록 위
지네 한 마리 간다

밀어붙이는 힘에 따라 휘어지는
등뼈의 각도 그 쏠림이
코너를 돌 때마다 좌우로 요동치고

사내의 눈썹이 수심 가득
고층 외벽을 천천히 오르내린다

심장에서 터져나오는 심호흡이
어둠을 뚫고 흩어질 때
잠시 둥글어지는 사내의 무척추

하루의 전모가
달의 폐곡선 속으로 스캔 되는 순간이다

내일의 바코드는 내일의 분량

야삼경
매지구름 한 점이
달무리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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