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들꽃 - 이우근

마루안 2020. 7. 3. 21:56

 

 

들꽃 - 이우근


풀숲이나 기타 경계 모호한 곳에 꽁초처럼 톡, 던져졌지만
한때 뜨거운 꿈도 있었지
절대 바람을 탓하진 않지, 비겁하니까
그러나 땅의 거름도 못 되고
바람의 생체기만 되어
우리, 만만한 얼굴들 하나쯤 제거되어도 표시나지 않지
서로 기대고 뭉개며 존재의 의미를 주무르며
사소한 책임전가로 옹알대는 즐거운 들판
그것이 우리의 생업(生業)이지
어둠이 별의 배후라면 땅은 우리의 막후실력자,
그래, 우리는 부드러운 폭력, 별의 배설물
의미 없는 항거의 나날들, 변두리의 공화국들,
독립이 아니라 폐기되는 소외일지도 몰라,
그래서 찬밥 신세, 하여 꿈의 실크로드를 무단으로 점령하여
자빠지고 넘어지며 무성한 생식으로
대책없이 지평 넓혀가며 일말의 존재감 과시,
나는 없어도 우리라는 평화, 그 무모한 위안,
그렇지만 한없이 울타리가 그리운 나날들.


*시집/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도서출판 선

 

 

 

 

 

 

잡인금(雜人禁) - 이우근


잡인금은 풀들의 언어였다
어느 절집 기둥에서 이 문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마른 풀들의 소리가 뜰마다 가득한 가을 오후
세월을 견디는 기둥의 둔탁함보다
해마다 자랐다 사라지는 풀들이 더 시대적이었다
풀은 기둥을 둘러서서 울타리를 치고 노려보고 있었다
시간의 결로 가다듬은 갈비뼈 같은 잎맥은
햇빛에 선연하게 투영되어 내세를 관통하듯 초연했다
잡인금은 풀들의 몸짓이었다
침묵보다는 저항이 더 낫다고, 아주 낮은 소통의 소음들
쪼개고 고르며 다스리고 있었다
그 오후의 햇살 속에서 나는 따뜻한 사람이고 싶었다
순간이나마 그런 존재이고 싶었다
제발이 저릴 것도 없었다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 외딴 곳이 있는데,
그곳을 개척하지 못하면
영원한 날품팔이 신세
밤은 깊고 마음을 덮힐 나의 집은 없었다
살을 바르고 뼈를 깎아도 도무지 이룰 것 없는
허망의  용맹정진, 풀들로부터의 소외,
그리하여 나는 더더욱 잡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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