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치부 - 서광일

마루안 2020. 7. 1. 22:28

 

 

치부 - 서광일

 

 

너는 줄곧 피 묻은 빤쓰 얘기를 했다


다들 해바라기처럼 빤히 보고만 있었다고
보는 사람과 보여 주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날카롭게 뼈마디를 쑤셔 대는지
내게서 반죽 치대는 소리가 났고
끝까지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들을 따라
떼어 낸 수제비 모양 바닥을 굴렀다


한참 저녁들을 먹을 시간에
그러다 죽을 수도 있었겠지만
죽음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시뻘건 눈물 콧물이 김치 국물처럼 떨어져
결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깨진 반찬통 옆에서 울었고
TV는 깔깔대며 나뒹굴었다


취한 남편이 지쳐 주저앉을 때까지
살이 터져 피가 몽글몽글 솟아도
어디 하나 아픈 줄 몰랐다고
목장교회 삼거리 골목 어귀에서
터진 쓰레기봉투마냥 전봇대에 기대앉아
빤쓰에 묻은 피가 번질까 봐
조각난 옷자락만 여미고 있었다


너는 내내 겨우 익힌 한국말처럼 버둥거렸다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파란출판

 

 

 

 

 

 

복숭아 - 서광일

 

 

비닐봉지가 터졌다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바지 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만 고르느라
봉지가 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알이 쏟아져 멍든 복숭아
뱉은 씨처럼 직장에서 팽개쳐질 때
그리하여 몇 달을 거리에서 보낼 때 만난
어딘가에 부딪혀 짓무른 얼굴들
사내는 아스팔트 위에다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 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 만에 사 들고 가는 과일인데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 흐르는 단물까지 빨아 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껏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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