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중심을 잡는 것들 - 강민영

마루안 2020. 6. 30. 19:38

 

 

중심을 잡는 것들 - 강민영


창이 비바람을 긁을 때 자칫 쓰러질 뻔했다
젖은 관절에 집중한 힘은 손바닥 끝에 모였다

막대비가 나무를 때릴 때
매 맞는 수천 개 손바닥은 상상한다
여기서 쓰러지면
나이테가 출렁이고
산길이 휘고
물줄기가 길을 바꾼 자리에
벼랑이 나타나고
바닥은 또
천 길 위로 솟구쳐 오르겠지,

꿇지 않은 무릎엔 섣불리 뿌리가 자라나고
굽은 허리가 멍든 이파리를 말린다

너는 내 앞에서 멧집을 키웠고
나는 네 뒤에 숨어 버티기만 했다

가끔은
뿌리가 뽑힐 듯이 흔들려야만
중심을 잡는 것들이 있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모자 - 강민영


차가운 바닥에 앉은 남자가
모자에 더러운 동전 하나 넣고
허공에 피가 도는 걸 경청하고 있다

그는 내 그림자보다 더 짙은 그늘 속에 있다

곁에 한참 서 있었다
나도 바닥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팔을 내밀어 엎드렸다

누군가가 떨어뜨리는
먹다 남은 고기 몇 점에
연신 어깨를 조아리지만
뼛속까지 스며 있는 남루를 덮을 수는 없었다

돌아앉아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몇 개의 명함을 넘긴다

할 수 없는 것 이상을 해야만 할 때
모자에 더러운 동전 하나 넣고
그늘보다 더 짙은 자리를 높이 받들고 앉는다



 

# 강민영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2015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가 첫 시집이다. 수필가, 조형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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