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 손택수 시집

마루안 2020. 6. 23. 22:22

 

 

 

모처럼 제대로 된 시집 하나 집중해서 읽었다.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촉촉하게 가슴을 적시는 흡인력 있는 싯구가 침을 꼴깍꼴깍 삼키게 했다. 울림을 주는 시집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손택수 시인은 등단 22년이 되었으나 이 책이 다섯 번째 시집이다. 한 권 정도 빼먹은 올림픽 주기로 시집을 낸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번 시집도 잘 숙성된 시가 독자를 감동 시킨다. 읽어보진 않았으나 얼마전에 시인은 동시집을 하나 내기도 했다.

그는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던 해에 다른 신문사에 동시를 출품해서 당선 되었다. 이전의 시집을 전부 읽긴 했어도 집중해서 읽은 것은 이 시집이 처음이다. 같은 시인의 시집도 언제 읽느냐에 따라 집중력과 감동이 다르다.

시집을 낸 출판사 또한 하나 빼고는 전부 창비에서 나왔다. 시인의 정체성 면에서 그와 가장 잘 맞는 출판사가 창비다. 나 또한 창비에서 나오는 시집은 가능한 읽으려고 노력한다. 이 시집이 440번이니 아마도 절반은 읽은 것 같다.

평론가들이나 시인들이 추천하는 시집이 많은데도 내 그릇이 너무 작아 가슴에 담지 못하는 시가 대부분이다. 아예 안 들어오는 시, 뭘 말하려는지 모를 시, 절반만 들어오는 시, 들어올 듯 말 듯 호기심을 유발하는 시, 그동안 지나쳤던 시들이 많다.

공부가 더 필요하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한다는데 그걸 실천하려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래도 이따금 가슴이 충만해지는 시집을 만나면 행복하다. 손택수의 시집이 그렇다. 어쩌다 내가 문자를 익혀 이런 호사를 누리는가.

시인도 지천명을 넘겼기 때문일까. 눈에서 힘을 조금 빼니 시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렇다고 시가 말랑말랑하고 달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작은 일상을 투시하는 예리한 시심은 여전하다.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때론 애틋하고 아프다.

연륜을 신뢰하지 않지만 그 나이에 들어서야만 쓸 수 있는 시가 있다. <잊는 일>이라는 짧은 시가 절절하다. <꽃 피는 것도/ 잊는 일// 꽃 지는 것도/ 잊는 일// 나무 둥치에 파넣었으나/ 기억에도 없는 이름아// 잊고 잊어/ 잇는 일// 아슴아슴/ 있는 일> 시인의 운명은 무병을 거부하지 못하는 무당처럼 선천적이다.

뒷편에 실린 <거위와 점등인의 별에서>라는 제목을 단 시인의 말도 인상적이다. 이렇게 긴 시인의 말을 읽은 적 있었던가. 잘 정제된 한 편의 수필이다. 오래전 지리산 골짜기를 발정난 반달곰처럼 쏘다닐 때 만났던 샘물의 청량감이 바로 이랬다.

숨이 차도록 벌컥벌컥 샘물을 들이키고 나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지금은 맛볼 수 없지만 더위와 갈증을 단숨에 달아나게 했던 그 물맛을 어찌 잊을까. 여름이 해찰을 부리다 일행을 놓쳐버린 초가을, 쑥부쟁이 잎에 눈물처럼 맺힌 아침녘의 이슬 같은,, 이 시집이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