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도착 혹은 도착 - 윤의섭

마루안 2020. 6. 11. 21:36

 

 

도착 혹은 도착 - 윤의섭


이 길로 고래가 지나갔다 안쪽으로 휜 가로수들
곧장 걸으면 다다른다고 했다
담장에 그려진 벽화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입 모양에도 솔깃하여
어느 문설주에 걸린 풍경 부르는 소리에도 혹하여
가다 보면 아까 들어선 길목 봄꽃 피었던 화단에 국화가 담겨 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는지 모른다 담장을 돌아서면
커피 향 그윽한 카페가 수줍은 듯 앉아 있다
고래가 묵어 간 해안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수천의 사계가 한꺼번에 흐르고 있거나 달이 묻혀 있을 것이다
이 길을 찾아 나서려면 알고 있는 길을 모두 버려야 한다
도착은 결코 돌아서지 못하는 중독
수없이 가 본 적 있어도 계속해서 가야만 하는 불치
섬이나 국경이나
수목 한계선을 넘어선 철새들이 다시 수목 한계선을 향해 날아야 하듯
너에게 무수히 도착했어도 새삼 도착해야 했다
길의 끄트머리에서 또 다른 길을 맞닥뜨리는 절망이라도 만나기 위하여
좌표을 잃고 어느새 은하계의 가장자리를 맴돌지라도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민음사


 

 

 


기연 - 윤의섭


그러니 따져 보면 그해에 태어난 것부터 쳐 주어야 한다
이듬해 달에 착륙한 아폴로 우주선은 음모론에 휩싸였지만
모든 처음은 언제나 끝의 방향으로 다가간다는 것

장마에 떠내려간 집에서 살아 남았다거나 저수지 물을 다 빼냈어도 익사한 친구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개인사를 새삼 들춰내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사후에 가깝다 교통사고로 잃었던 기억을 다시 찾은 후에 나는 더욱 귀신에 가깝다 내가 보인다면 내가 너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기까지 허투루 먹은 밥은 없다
횡단보도를 일 초라도 늦게 건넜더라면 그래서 막차를 타지 못했더라면

장고 내일을 향해 쏴라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어느 연약한 짐승의 죽음 이런 영화 목록
폴모리아 악단 에디뜨 피아프 비치 보이스 스팅 그들의 음악
오마르 하이얌 안나 아흐마또바 앨런 긴즈버그 앤 색스턴 실비아 플라스라는 영혼

그러니 따져보면 나는 결국 여기 앉아 있어야 했다는 것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꽃잎을 밟거나
그 후로도 천만번의 계절이 흘러가는 것조차
네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게 된 사소한 이유


 

 

# 윤의섭 시인은 1968년 경기 시흥 출생으로 아주대 국문과를 졸업했고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석사, 아주대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과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말광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묵시록>,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