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전생에 두고 온 - 김인자

마루안 2020. 6. 9. 22:30

 

 

전생에 두고 온 - 김인자


숨을 헐떡이며 야트막한 언덕에 닿았다
붉은 사막 가운데
거짓말처럼 바위산이 우뚝 서있고
뒤편엔 소금호수가 눈처럼 빛났다
뜻밖이었다
모래언덕 정상에는
더벅머리에 수염 덥수룩한
눈도 귀도 입도 없는 동그란 얼굴 하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 가지 말라 애원이다
뭉그러진 얼굴이 안타까워
마른 가지를 꺾어 눈과 눈썹을 만들고
오뚝한 콧날과 입술도 그렸다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도
미소를 잃지 않는 듬직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거친 머릿결 쓸어주며
외롭더라도 잘 지내라며
토닥토닥하고 돌아서는데
오 이런,
낯이 익다 초면이 아니다

누구시더라
누구시더라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춘몽(春夢) - 김인자


신기루
격렬 뒤 적막
이 세상에만 있는 계절
산을 넘고 둑을 범람해서라도
기어이 닿고 마는 그리움
우울과 불안을 이기는 온기
입안에서 천천히 녹는 사탕
온몸에 슬픔의 수위가 높아지면
수억만 개의 눈물주머니가
동시에 터지는 이변 같은 봄비
토네이도와 쓰나미가 지나간 자리
낡은 의자를 쓰다듬듯
지극한 어루만짐
대책 없이 등이 간지러운
사랑, 깨어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짧고 깊은 잠


 

 

# 김인자 시인은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19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겨울 판화>, <나는 열고 싶다>, <상어떼와 놀던 어린 시절>, <슬픈 농담>, <당신이라는 갸륵>이 있다. 시집보다 많은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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