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돋보기의 공식 - 우남정

마루안 2020. 6. 3. 22:22

 

 

돋보기의 공식 - 우남정


접힌 표정이 펴지는 사이, 실금이 간다

시간이 불어가는 쪽으로 슬며시 굽어드는 물결
무심코 바라본 먼 곳이 아찔하게 흔들리고 가까운 일은 그로테스크해지는 것이다

다래끼를 앓았던 눈꺼풀이 좁쌀만 한 흉터를 불쑥 내민다 눈꼬리는 부챗살을 펼친다 협곡을 따라 어느 행성의 분화구 같은 땀구멍들, 열꽃 흐드러졌던 웅덩이 아직 깊다

밤이라는 돋보기가 적막을 묻혀온다 달빛이 슬픔을 구부린다 확실한건 동근 원 안에 든 오늘뿐 오무래미에 샛강이 흘러드는 소리, 쭈뼛거리는 머리카락이 먼 소식을 듣고 있다 몰라도 좋을 것까지 확대하는 버릇을 나무라지 않겠다

웃어본다 찡그려본다 쓸쓸한 표정을 지어본다
눈(目)에도 자주 눈물을 주어야겠다고,
청록빛 어둠이 내려앉는 저녁
지금 누가 나를 연주하는지
주름이 아코디언처럼 펴졌다 접어진다

분청다기에 찻잎을 우리며
실금에 배어드는 다향(茶香)을 유심히 바라본다

먼 어느 날의 나에게 금이 가고 있다
무수한 금이 금을 부축하며 아득하게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MRI - 우남정


나를 횡단하는 빛이
나의 단면을 어딘가로 전송하고 있었다

달팽이관을 뚫고 접속되는 무지한 소음
이것은 어떤 죽음의 콘셉트일까
그러나 죽음이 시끄러워 죽을 수가 없었다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것들 내가 아니면서 나라는 것들이
무수한 순간으로 쪼개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이 나란 말인가
누가 그 갈피에 반란을 숨겨놓았단 말인가

유리 저쪽, 흰 가운의 그가
메스도 없이,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비틀어진 나의 각도를 캐묻고 있었다
저 음습한 길모퉁이에 이상한 그림자는 또 뭐지
껍질 속, 쭈그러진 호두알이 왼쪽으로 한참 쏠려 있군
일곱 번째 척추 이탈은 예상 밖의 일이야
그의 눈동자가 중얼거린다

저 흰 물건이 또 나를 먹었다 뱉어놓는다
나를 다 이해할 때까지
나는 기꺼이 죽음을 즐기기로 한다

굉음이 조금씩 명랑해지고 있다



 

# 우남정 시인은 1953년 충남 서천 출생으로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제16회 김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가 첫 시집이다. 그러나 본명인 우옥자로 시집 <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가 2015년 발견 시선으로 나왔기에 두 번째 시집이라 해도 되겠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밥 한번 먹자 - 황형철  (0) 2020.06.07
천 년 후 - 박철영  (0) 2020.06.03
장미 - 정덕재  (0) 2020.06.02
풍선껌 - 이우근  (0) 2020.06.01
나도 늙겠지 - 한관식  (0) 2020.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