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밥 한번 먹자 - 황형철

마루안 2020. 6. 7. 19:12

 

 

밥 한번 먹자 - 황형철 


거짓말은 아니지만 
언제 밥 한번 먹자, 밥 한번 먹자 
잘 지키지도 않는 공수표를 던지는 건 
밥알처럼 찰지게 붙어살고 싶기 때문이지 
단출한 밥상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 것만으로 
어느 틈에 허기가 사라지는 마법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 
제아무리 공복이라도 
뜸 들일 줄 알아야 밥맛이 좋듯 
세상일은 기다려야 할 때가 있어 
공연히 너를 기다리는 거야말로 
너에게 가는 도중이라는 걸 알지 
가지런히 숟가락 놓아주듯 
허전한 마음 한구석도 
네 옆에 슬쩍 내려두고서는 
그랬구나 괜찮아 괜찮아 
위로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모락모락 갓 지은 밥처럼 
뜨거운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지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다섯 그루 - 황형철 


염치쯤이야 모른 척하고 
꼭 좀 탐이 나는 게 있어 
가만 앉아서도 상춘할 수 있는 산수유 하나 
묵을 갈아 시를 곁들일 수 있는 홍매화 하나 
게으른 나 대신해 먼 데까지 향기 나눌 수 있는 자목련 하나 
긴긴 무더위쯤 함께 이겨낼 탐스러운 배롱나무 하나 
까치밥도 넉넉히 남길 수 있는 감나무 하나 
이렇게 딱 다섯 그루만 가찹게 좀 두면 
날마다 가슴은 두근반 세근반 할 것인데 
멍하니 해바라기하며 
심심소일 살랑살랑 바람도 훔치고 싶어 

 

 

 

 

*시인의 말

체질이 굼뜬데 시간은 너무 빠르다. 저만치 앞서간 것들이 부럽지는 않으나 지나온 길에 아쉬움이 자욱하다. 시에 갇힌 인연의 숨들이 가쁘니 미안하다. 매 순간 진정이었고 간절했다고는 하나 불찰이 없지 않을 것이다. 곰곰 돌아볼 일이다.
가만 보면 남은 여정이 많지 않다. 세상은 더 급하게 흘러갈 것인데 내 짧은 보폭으로 바람을 동경할 수 있을까. 다시 길을 나서려는데 햇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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