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천 년 후 - 박철영

마루안 2020. 6. 3. 22:32

 

 

천 년 후 - 박철영

 

 

푸른 나무였다가 고사목이 되어
하늘을 받치고 있는 나를 본다
바위틈에 뿌리내린 들풀처럼 살다
노루 고픈 배를 채워주는
끼니가 되기도 했을 긴 시간들
몇 백 광년을 지나 당도한
별무리들도 내려와 그만 떠나지 못해
산 능선에 뿌리 박힌 원추리로 살다
일 년에 딱 한번 꽃으로 피어나는 세석 평원
다들 전생의 업보 갚느라
고도 수행을 마다하지 않듯
결어를 맺지 못한 몸으로
후생에서 다시 맞닥뜨릴 천왕봉 아래
영혼 맑아질 몸피를 벗어 두었다
천 년을 표식 해놓은 눈금을 지울 때마다
또 다른 천 년으로
다가올 전생을 미리 살고 있다

 


*시집/ 꽃을 전정하다/ 시산맥사

 

 

 

 

 

 

대전 부르스 - 박철영

 

 

부르스라고 붙여진 노래 치고
가슴 짠하지 않은 노래가 없듯
한 시절 잘 나가던 사람들도
일몰 뒤 알 수 없는 아련함은 더 깊다
파시(波市) 같은 모임 뒤 끝
홀로 남은 남자의 등 뒤로 밀려오는
목포행 대전발 0시 50분
막차를 타야하는 인생의 시간표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가슴 아린 그리움이란 것이
너무나 막연해서만은 아니다
누구나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
벽에 걸린 오래된 옷 한 벌처럼
잊혀진 허공을 붙잡고 있다
이 밤을 새고 나면 다시는 깁을 수 없는
허름해진 추억들을 떠올리며
연향동 뒷골목 핑크 노래방에서
홀로 춤을 추고 있는 老 시인
늦도록 별자리 속 음표를 따라나섰다
목포행 완행열차를 놓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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