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속이 배꽃 같은 육단서랍장 - 사윤수

마루안 2020. 5. 30. 18:30

 

 

속이 배꽃 같은 육단서랍장 - 사윤수

 

 

한 가정사를 다 보고 들은 참고인이겠다

서른두 살 된 첫아이와 동갑이고

열네 번 이사에 가구 고참으로 남았다

보르네오 섬 어느 나무 가문의 혈족이었을까

허술한 살림 중에 제일 인물 좋던 육단서랍장

안쪽은 배꽃같이 흰데, 둘째 칸

손잡이가 떨어지고 모퉁이도 벗겨져 그 명이 조금씩 기울었다

언제부터 그것은 뒷방 늙은이가 되었다

때가 되면 곧 내다 버리리라

 

오뉴월 이삿날 퇴출 일 순위 육단서랍장

(서랍장을 타이핑하려는데 '서럽장'으로 찍혀 고쳐 찍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고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한다고

현명한 결정의 대가처럼 내가 떠들자

이사 인부들이 서랍장을 가져가겠다고 한다

나는 서랍장과 마주치지 않으려 눈을 피했는데

 

마음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은 아직

한 발자국도 떠나보낸 것이 아닐런가

겉에 허물이 있으나

속이 깨끗한 것을 버리는 일은 쉽지 않더라

나는 속도 허물투성이 아니냐

뱉은 말을 슬쩍 거두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한 식구가 되어

이승의 안방에서 나와 동거 중인 육단서랍장

 

 

*시집, 그리고,라는 저녁 무렵/ 문학의전당

 

 

 

 

 

 

슬픔의 높이 - 사윤수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옆에 앉은 중년 여자가 운다 
미세하게 흐느끼며 훌쩍훌쩍 콧물을 삼킨다 
마음 아파 우시는지
몸이 아파 우시는지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뒤인지 모를, 
휴대폰을 켜고 들여다보고 
휴대폰을 끄며 고개 떨군다 
그 속에 아픔이 저장되어 있는지 
그 속의 아픔이 삭제되지 않는지 
실밥처럼 툭툭 터질 듯한 울음을 
손수건으로 꾹꾹 여민다 

슬픔은 식물성이어서 
고도 칠천 미터 상공에서도 발아하는구나 
화물칸에 싣지 못하고 
선반에 따로 올려놓을 수 없는 슬픔,
무심한 구름 속을 날아가는 쇳덩이 안 
이쯤 높이에서도 슬픔은 창궐하나니 
항로를 이탈한 그녀의 눈물이 
기류가 불안정한 지역을 오래 통과하고 있다 
허공의 비포장길을 
흔들리는 슬픔 혼자 가고 있다

 

 

 

 

 

*시인의 말 

좋아하는 시가 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오다 말다 가랑비 
가을 들판에 
아기 염소 젖는 
들길 시오리 
개다 말다 가을비 
두메 외딴 집 
여물 쑨 굴뚝에 
연기 한 오리 

-작자미상 

오래전부터 나는 이 시를 부적처럼, 경전처럼 여겨왔다. 
이 시에는 내가 생각하는 시의 가치가 다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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