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운 천성 - 고증식

마루안 2020. 5. 30. 18:55

 

 

그리운 천성 - 고증식


만나면 입부터 벙글어지던 섭이 조카
오늘은 날 보자마자 눈물부터 흘린다
흙 파먹던 손 놓고 다 늦게 고향 뜨더니
안산 어디서 공장 산다는 소리도 들리고
중고 트럭 한 대 빌려
폐지 모으러 다닌다는 소식도 들리더니
모처럼 쉬는 날 나들이 길
왜 중앙선 너머
반대편 버스는 달려가 박았는지 몰라
순간적으로 뇌졸중이 왔다고도 하고
깜박 정신 줄 놓았다는 얘기도 있지만
일주일 지나 반쯤 정신만 돌아오고
몇 년 지나도 몸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래저래 딱한 사정을 이웃들이 알려
관에서 장애등급심사를 나왔더란다
아침부터 얼굴에 물도 찍어 바르고
죽을힘을 다해 몸도 세워 앉힌 뒤에야
판정 나온 손님들 맞았더란다

하염없이 누워 눈가만 짓무르던 몸이
손가락 꼽으라면 손가락 꼽아주고
구구단 외라면 구구단 외고 덧셈 뺄셈에
묻지도 않은 옛 동산의 추억까지
주저리주저리 기를 쓰고 답하더란다
옆에서 암만 눈치를 줘도
나 어때, 나 잘하지, 나 아직 쌩쌩하다고!
오삼춘, 오삼춘, 불러대며
몇 살이나 어린 내게도
만나면 늘 흰소리부터 날려대더니


*시집, 얼떨결에, 걷는 사람

 

 




얼떨결에 - 고증식


나이 팔십에 여주 당숙은
다신 수술 안 받겠다 선언하고
두 해쯤 더 논에서 살다 돌아갔다
누구는 애통해하고
누구는 대단한 결단이네 평하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그랬단다
얼떨결에 한번은 했지만
수술받고 깨어날 때 너무 아프더란다
이건 조카한테만 하는 얘기지만
치과도 안 가본 놈이 선뜻 따라가고
남자들 군대도
멋모를 때 한번 가는 거 아니냐고
얼떨결에 세월만 갔지 나이 먹었다고
다 깊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죽을 때도 아마 그럴 거라고
얼떨결에 꼴까닥하고 말 거라고
그렇게 얼떨결을 노래하던 당숙은
내년에 뿌릴 씨앗들 골라 놓고
앞뒤 마당도 싹싹 비질해 놓고
그 길로 빈방에 들어 깊은 잠 되었다




*시인의 말

타박타박 걸어 어느새 고갯마루 이르렀다.
돌아보니 어느덧 갑년,
아홉 살짜리 두고 아버지 떠나시던 그해가
지금 딱 이 나이다.
아버지 못 가보신 길을 이제부터 시작한다.
새소리 듣고 바람의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우짜든지 따뜻하고 유쾌하게 뭉클하게!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도 늙겠지 - 한관식  (0) 2020.06.01
나비라서 다행이에요 - 이원하  (0) 2020.05.31
속이 배꽃 같은 육단서랍장 - 사윤수  (0) 2020.05.30
순천만 풍경 - 이무열  (0) 2020.05.30
낯선 사람 - 허형만  (0) 2020.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