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비라서 다행이에요 - 이원하

마루안 2020. 5. 31. 22:02

 

 

나비라서 다행이에요 - 이원하


꿈에 나타난 할아버지

내 할아버지가 맞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광대 근처에, 낯선 구멍 하나

어쩌다 눈이 세 개가 되셨냐고 물으니
내가 보고 싶어 그러셨단다

아프지 않으셨냐고 물으니
나비가 앉았다 날아간 정도라며 웃으신다

내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듯해
침만 삼키고 있으니

까닭을 알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문학동네


 

 

 

 

여전히 슬픈 날이야, 오죽하면 신발에 달팽이가 붙을까 - 이원하


하도리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슬슬 나가자
울기 좋은 때다
하늘에 이불이 덮이기 시작하면
밭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혼자 울기 좋은 때다

위로의 말은 없고 이해만 해주는
바람의 목소리
고인 눈물 부지런하라고 떠미는
한 번의 발걸음
이 바람과 진동으로 나는 울 수 있다

기분과의 타협 끝에 5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좁은 보폭으로 아껴가며 걷는다
세상이 내 기분대로 흘러간다면 내일쯤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데리고 비를 떠밀 것이다

걷다가
밭을 지키는 하얀 흔적과 같은 개에게
엄살만 담긴 지갑을 줘버린다
엄살로 한 끼 정도는 사 먹을 수 있으니까
한 끼쯤 남에게 양보해도 내 허기는 괜찮으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검은 돌들이 듬성한 골목
골목이 기우는 대로 나는 흐른다
골목 끝에 다다르면 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거미가 해놓은 첫 줄을 검사하다가
바쁘게 빠져나가듯 집 안으로 들어간다




# 이원하 시인은 1989년 서울 출생으로 연희미용고, 송담대학 컬러리스트과를 졸업했다.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미용실 직원, 단역배우를 하다 제주 하도리로 이주해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창작을 했다고 한다. 술은 비교적 센 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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