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의 자세 - 김정수

마루안 2020. 5. 27. 19:07

 

 

꽃의 자세 - 김정수


속을 꺼내 널자
환멸이 올라왔다

주춤주춤
담장 밖 맴돌던 손이 구름 속을 헤집어
꽃의 모가지를 낚아챘다 갇혀 있던 물 번져
길에 방화범을 풀어놓았다

탐스러운 한기(寒氣)로 겨울을 버틴 덩굴장미가
와락, 노란 혀를 내밀었다 트럭이
개처럼 짖으며 달아났다 바람이 덜컹거리는 짐을
채소와 과일로 구분하곤 굴러떨어졌다

창백한 뺨이 속도의 기색을 살피고 사라지자
꽃병의 눈금이 달로 기울었다

새로운 종(種)으로 태어난 덩굴장미가
시간 속에 앉아 귀를 물들였다 익숙하지만 그대로인 꽃병이
꽃의 자세를 일으켜 세웠다
부끄러운 감정이 뒤에서 서성거렸다

물을 끌어당기는 것은 조금 진실을 닮았다
오랜된 말이 다 익었다


*시집/ 홀연, 선잠/ 천년의시작

 

 




환청 - 김정수


목발에 몸 기댄 늦봄
차가운 방이 방을 탈출한다.

차도보다 높은 언덕에 뒤돌아 앉은 의자 다리 부러져 모로 누운 의자 의자에 의지한 의자가 늙은 아이처럼 멈춰있다.

세간을 실은 트럭이 힘겹게 고갤 넘자
비좁은 비탈이 심하게 다리를 전다.

오래된 말소리가 등 뒤에서 굴러떨어진다.

종종 잦아드는 바람은 길의 환승
안이 더 따뜻하다는 오랜 편견에
살아있는 무덤처럼 당신은 돌아오지 않는다.

함께 걸었던 천변 왕벚나무에서 방들이 휘날린다.
잠깐의 휴식도 쓸쓸한 허락이 되는

얇고도 가벼운 겹겹의 방들이
시냇물 위에
환청처럼 떠있다.



 

# 김정수 시인은 1963년 경기도 안성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서랍 속의 사막>, <하늘로 가는 혀>, <홀연, 선잠>이 있다. 28회 경희문학상을 수상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지러운 길 - 황규관  (0) 2020.05.28
작은 주름 하나에도 마음 깃들여 - 김윤배  (0) 2020.05.27
시대와 불화한 자의 초상 - 정기복  (0) 2020.05.26
전생 - 박시하  (0) 2020.05.26
눈물 한 끼 - 이서화  (0) 2020.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