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 박시하
한 마리 버려진 개로서
교회당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 적이 있다
빗줄기 사이에서
무언가 희게 펄럭인 걸 기억한다
발은 꺾였고 눈은 멀었는데
어찌 볼 수 있었을까
사실 나는
교회당 그늘에서 숨죽인
타락한 천사였다
이제는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것을
너무도 사랑하여 벌을 받았다
지상의 것
더럽고 추악했을 텐데
어찌 사랑했을까
개의 멀어버린 눈 속에
깃들어 푸르른 죄악
사랑했으니
인간으로 태어남이 마땅했을 것이다
*시집/ 무언가 주고 받은 느낌입니다/ 문학동네
저지대 - 박시하
비 오기 전에는
낮은 바람이 불어왔다
생을 가로지르며
슬픔을 무찌르는 로맨스를
믿은 적도 있다
어떤 감정도
목숨보다 절실하지는 않은데
사랑
던져야 할 것들이 많아서
높고 아름다운 것
빛에 눈이 멀기 전에
습기에
이끌려 내려왔다
낮은 지대에서
사랑
하는 것이 더 좋았다
끈끈하고 더러웠기에
던져버릴 수 있는 것도 더는 없었기에
알몸으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고통의 옷을
입으려고 했다
# 박시하 시인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이화여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했다. 2008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눈사람의 사회>, <우리의 대화는 이런 것입니다>, <무언가 주고받은 느낌입니다>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의 자세 - 김정수 (0) | 2020.05.27 |
---|---|
시대와 불화한 자의 초상 - 정기복 (0) | 2020.05.26 |
눈물 한 끼 - 이서화 (0) | 2020.05.25 |
마침내 바보들이 돌아왔다 - 이원규 (0) | 2020.05.23 |
낙동강 성형일지 - 김요아킴 (0) | 2020.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