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대와 불화한 자의 초상 - 정기복

마루안 2020. 5. 26. 21:45

 

 


시대와 불화한 자의 초상 - 정기복


내게 시집 크기의 음영이 짙은 초상 한 점 있다
아침 거른 분주한 출근길에도 서류 가방 챙기듯 들고 보고
다들 퇴근한 늦은 밤에도 이제야 내 시간이려니 느릿느릿 들여다보는
누렇게 퇴색되어 빛바랜 흑백의 표구 한 점 있다

흰 저고리 상투머리 굳게 다문 입
불거진 광대뼈에 타오르는 불온한 눈매
백년 세월도 아랑곳하지 않는 너른 이마에 봉분처럼 솟은 혹

시대와 불화한 자의 매서운 눈초리가
순응과 적응의 내 일상 저편에서
횡설수설 왁자지껄한 술집의 벽 위에서 줄곧 노려보는데....

까막눈처럼 속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발통문 한 장 있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스라소니 - 정기복


천부적 싸움꾼이 있었다
앉은자리에서 대여섯 걸음 훌쩍 날아오른
박치기에는 당할 자 없는
오체투지하는 맨주먹 싸움의 가히 예술이었다 한다
일대일 싸움에서 그가 한 번이라도 진 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
객기와 울분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근력과 스피드를 기준으로 또
카더라 통신의 일설과 풍문에 따르자면
그는 신화이자 전설이었다
신의주, 상해, 만주, 서울을 주먹 하나로 아우른
그야말로 동아시아에 적수가 없다 하던
그가 왕창 깨졌다
그를 깬 것은 조직화된 폭력들
야구방망이, 야전삽, 손도끼 등 비열한 흉기들인데
그가 깨진 것은 협소한 장소가 원인이었다

최근에도 한 스라소니가 있었다
고독한 그의 마지막 발을 딛게 하고
최후를 지켜본 것은 부엉이바위였다
일찍이 싸움에 임해 그는
대세와 힘의 논리로 치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는
사즉생의 깡이라면 깡인데
'원칙을 지키면 진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지겠다'라는
이를테면 벼랑 끝의 비장한 정면 승부로
예의 그 원칙론이 이기기도 하였으나
만연한 비겁의 처처에서
끝내 졌다
그를 깬 것은 재벌과 학벌, 지역주의와 언론이라는 흉기들
그리고 몰이해의 시간들
그는 졌으나 스스로 졌고 싸움은 역사가 되었다
패할지라도 걸어가야 할 길은
맨주먹 스라소니들이 싸워야 할 미래가 되었다

전설의 스라소니는 공간이 제약이었고, 역사의 스라소니는 시간이 제약이었다.



 

# 정기복 시인은 충북 단양 출생으로 19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1999년 시집 <어떤 청혼>을 낸 후,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이 20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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