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다 - 이희인

마루안 2020. 4. 20. 19:05

 

 

 

이런 여행 책을 좋아한다. 어디 가면 풍광 좋은 유명한 곳이 있고 어디 가면 맛있는 식당이 있다는 흔해 빠진 여행책들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이런 책은 보석처럼 빛난다. 여행도 여러 유형이 있겠지만 때론 이렇게 사색하는 여행도 필요하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어릴 적 내가 다닌 학교도 공동묘지 터였다. 운동회나 소풍날 늘 비가 내린 것도 그 터에 살던 구렁이를 죽이는 바람에 저주를 받아 그런다고 했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 또한 예전에 묘지가 많았을 것이다.

택지 개발은 도심이 아닌 주변 산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묘지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맞다. 나는 후생을 믿지 않는다. 죽으면 그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 나는 화장해서 수목장을 원한다. 해부용 시신 기증 의사도 있다.

티벳의 풍장이 야만적이라지만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는 환경친화적 풍습이라고 생각한다. 묻어도 오염이고 태우면 더한 오염 물질을 방출한다. 흙으로 돌아가기 참 힘들다. 이 책은 유명인들의 묘지를 돌아본 여행기다.

글쓴이가 작정하고 묘지 위주로 순례를 했다. 화가, 사상가, 문학가, 음악가 등 예술 분야 인물 위주의 묘지다. 웬만한 시인 못지 않게 글솜씨가 뛰어나다. 여핼기 곳곳에 저자의 독서 편력을 느낄 수 있는 빼어난 인용 문장들 또한 감초다.

태어난 곳과 죽은 곳이 달라 국적과 묻힌 곳이 일치하지 않는 곳도 많다. 영국에 있는 세익스피어 묘지부터 시작한다. 맑스 묘지와 함께 나도 가 본 곳이라 매우 익숙하다. 예전에 나도 영국에 있는 유명 묘지는 여럿 돌아봤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등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들 무덤은 함께 간 것처럼 두근거렸다. 톨스토이가 나고 자라 살다가 묻힌 <야스나야폴랴나>의 깊은 숲 속에 있는 작은 무덤까지 눈 속을 뚫고 간 저자의 묘지 기행은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파리의 그 유명한 공동묘지 페르라세즈에 있는 예술인들 묘지도 여럿 나온다. 나도 다행스럽게 쇼팽의 알파벳 철자는 몰라도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 중앙묘지에 있는 음악가들의 묘지 기행도 인상적이다.

베토벤, 슈벨트, 브람스 등 인류가 낳은 불세출의 음악가들은 묻혀서도 감동을 준다. 쿠바에 묻힌 혁명가 체 게바라의 무덤까지 가면서 저자는 불꽃처럼 살다간 한 인간의 내면 세계를 반추한다. 그들이 꼭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프랑스 세트에 묻힌 폴 발레리와 스페인의 작은 마을 포르부에 잠들어 있는 발터 벤야민의 일생은 긴 여운을 남긴다. 바람이 인다. 살아야겠다고 했던 발레리는 평균 수명을 살다 고향에서 영면에 들었지만 벤야민은 나찌를 피해 떠난 망명길에서 마흔 여덟에 자살을 하고 그곳에 묻혔다.

모든 사람의 일생이 우주고 역사의 한 부분이지만 대부분 잊혀진 인생을 산다. 지금까지 살다 떠난 모든 사람을 기억할 수도 없다. 인생은 짦지만 예술은 길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실감한다. 이 사람들도 딱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