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을 위한 근정(謹呈) - 황학주
꽃에서 꽃물을 들어내는 눈에나 보이는
묘한 다저녁때
당신이 맑은 보석을 맡기고 간
하늘의 전당포에도
물결은 북을 치듯 울렁인다
객지가 이렇게 넓은데
찾으러 올 일을 생각해보는 때마침의 노을빛이란
망연한 인연의 이목구비일는지 모른다
눈을 뗄 수 없어 끝이 안 나고
발이 떨어지지 않아 지지 않는
이별들
가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
꽃다발은 묶이지 않는 꽃들을 남겨둔다
노을은
당신의 애달은 얼굴을 메우고 흘러내린다
섬섬옥수라는 굳은 데와 터진 데를 다 지난다
퉁퉁 부은 눈으로 왔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점성(占星)으로는 사랑운이 아직 있다고 이야기해줄 것이다
밤이면 요 위로 나란히 괴어들던 우리도
어느 한쪽의 소식이 끊어져
한동안 서로 인질을 놓치는 사이
어린 어머니여
내가 갈 때까지
육신이라는 화단은 더 망치지 마시구려
*시집,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문학동네
하루 - 황학주
계속해서 한곳에 살고 하루가 간다
정신이나 밥상을 차리는 일일까 다 같은 이름일까 하루란
입는 옷은 같지만
날마다 길이가 달라지는 세상 한 귀퉁이에 걸친 채 뻗대고 살고
벽에 걸린 몸의 윤곽은 아픈 데를 다린 것이다
살아서 죽기까지 하던 날도 있었지만
숱하게 죽어서 살아가는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 참, 괴로움의 궁극에 내는 신음 소리가 유리했던 건 사실이나
그런 시간도 간 곳 없고
누구나 시간에 말려
결사를 몇 번이나 하는 순간을 사는 건데
오늘까지는 변화가 빠진 것 같고
내일부터는 변화가 없을 것 같다
물크러지는 냄새에
영혼인가 싶어 제 살 속으로 젓가락을 찔러봤던 잘못이 가장 이상하다
하루치 재난을 훔쳐
십자목에 달린 두 팔과 두 다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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