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떤 인연 - 정일남

마루안 2020. 4. 23. 19:07



어떤 인연 - 정일남



여기 길가에 꽃이 피어있다

꽃은 향기에 운명을 걸고 기다린다

가진 것이 향기뿐인데

깜박 잠든 사이에 나비는 그냥 지나간다

꽃은 간절함을 말하려 했으나

나비는 꽃만 찾아다니는 게 아니었다

맹인이 피리를 불며 가는 뒤로 따라붙는다

나비는 음악에도 관심이 있었다

영양실조에 걸린 낮달과

새들이 옮겨 다니는 나뭇가지

그 아래 풀잎에 앉아 쉬었다가

공원묘지 쪽으로 가는 중이다

비석에 새긴 이름을 찾아서



*시집, 금지구역 침입자, 넓은마루








생애 - 정일남



갈대밭에서 낮잠 자던 바람은 떠난다

갈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기다림은 물리지 않는 것이다

개미가 외나무다리를 줄지어 가는데

굴렁쇠 굴리며 달이 서역으로 가는 길이라면

신화의 아테네 아니겠나

모두 꽃이 되려고 하나 나는 잎이 되어도 좋겠다

석수장이는 돌을 깎고 나는 글을 깎는다

깎고 다듬어 무형의 탑을 세우겠다

눈에 눈물이 없다면 마음엔 호수가 없을 것


삼류의 슬픔에 애착은 없고

소크라테스의 수염에 경의를 표한다

19세기 황톳길 남도의 유배지로 걸어가야겠다






*시인의 말


가난의 힘은 질기다.

목숨도 질겨 여기까지 왔다.

객지를 떠돌며 시로 위로받고 살았다.

흙벽에 등 대고 살았던 고향은 멀다.

시는 내가 살아있다는 보증서다.

12번째 시집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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