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도화사거리에서 - 정진혁

마루안 2020. 4. 22. 18:59

 

 

도화사거리에서 - 정진혁


엄마는 자꾸 도화사거리라고 했다 
약국을 말할 때도 도화사거리 약국이라고 했고 
도화사거리에 가서 두부를 사 오라고 했다 
도화사거리 미용실 골목 안에는 
여기인지 거기인지 모르는 분홍이 있었다 

생선을 머리에 이고 
생산 사세요, 외치며 수많은 골목을 걸었던 엄마의 몸에서 
비린내 대신에 분홍의 냄새가 났다 

도화사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길었다 
보이지 않는 도화를 찾으며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 골목은 그저 복사꽃 한 잎의 두께만 했다 
엄마의 안과 밖 
그 사이에 놓인 분홍이 너무나 컸다 
여기인지 거기인지 알 수 없는 분홍을 
그냥 담고 있었다 

분홍분홍 얘기하는 저 사거리 추어탕집 지붕 위로 
연 이틀 비가 내렸고 
엄마는 도화사거리라는 희미한 말을 남기고 가셨다 
나는 사거리의 풍경이 내 몸으로 몽땅 흘러드는 걸 바라보았다 

분홍이 아무렇게나 휘날리는 저녁 
슬픔이 반복될 것이라는 걸 
나는 도화사거리 골목 
시멘트 벽에 기대어 알게 되었다 

아무 뜻 없이 분홍을 날리는 골목의 궁금을 
저 알 수 없는 세계를 열어 보이는 분홍의 신비를 
이따금 만졌다 

엄마의 한숨 같은 분홍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시집,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 파란출판

 

 

 

 

 

꽃을 그냥 보냈다 - 정진혁


꽃 저문 자리가 어두웠다
안이 잠기고 있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끼니처럼 왔다 갔다

머리카락이 빠져나가고
당신이 빠져나가고

벚꽃이 지는 일이
손금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누군가의 손을 놓으며 서로를 건너는 일이고
아프지 않겠다고 돌아서는 속사정이고
서로가 서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찔레꽃 떨어지는 일에 한 시절이 깎이는 줄도 모르고
당신이라는 이름 하나가 희미해지는 줄도 모르고

꽃잎 하나 떨어지는 일이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동사무소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고
당신의 바랜 뒷모습을 쳐다보는 일인지도 모르고

목련꽃 한 잎이 지는 일에 봄빛이 흐려지는 줄도 모르고

당신의 생김새를 열어 보고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일이
분홍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모르고



 

 

# 정진혁 시인은 1960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공주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간잽이>, <자주 먼 것이 내게로 올때가 있다>,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