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 전동균

마루안 2020. 4. 22. 19:07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 전동균



아프니까 내가 남 같다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취객 같다


숨소리에 휘발유 냄새가 나는 이 봄날
프록시마b 행성의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이들도 혼밥을 하고
휴일엔 개그콘서트나 보며 마음 달래고 있을까


돌에겐 돌의 무늬가 있고
숨어서 우는 새가 아름답다고 배웠으나
그건 모두 거짓말


두어차례 비가 오면 여름이 오겠지
자전거들은 휘파람을 불며 강변을 달리고
밤하늘 구름들의 눈빛도 반짝이겠지
그러나 삶은 환해지지 않을 거야
여전히 나는 꿈속에서 비누를 빨아 먹을 거야


나무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고
물고기도 그냥 헤엄치는 게 아니라지만
내가 지구에 사람으로 온 건 하찮은 우연, 불의의 사고였어 그걸 나는 몰랐어


으으, 으 으으
입 벌린 벙어리 햇볕들이 지나가고
취생몽사의 꽃들이 마당을 습격한다


미안하다 나여, 너는 짝퉁이다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창비








떨어지는 해가 공중에서 잠시 멈출 때 - 전동균



썰물의 드넓은 뻘
휘어진 물길을 타고 흘러나오는 핏덩어리들
핏덩어리 같은 숨소리들


우리는 먼 곳에서 왔고
오늘밤엔 더 먼 곳으로 가야 하지만
뻘 위의 널 자국, 파헤쳐진 흙들에게
새꼬막, 낙지, 짱뚱어 들에게
용서를 빌듯 서 있어요


급히 달려가다 쓱 한번 뒤돌아보는,
입을 앙다문 바람 속에 철새들 자욱이 날아오르고
울음도 없이 사라지고


풍랑과 제사를 기억하며 흩어지는 집들
끊임없이 삐걱대는 문들


어딘가요? 무너지는 갈대밭 속인가요?
뻘을 바라보는 당신 눈 속인가요?
모닥불 타는 연기가 나요
추운 혼들 부르는 그 냄새를 맡으면
아, 거짓말을
거짓말 같은 고백을 안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 사람으로 와 기쁘다고
계속 아프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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