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세탁기를 돌렸더니 당신이 돌아왔네 - 서광일

마루안 2020. 4. 20. 19:23



세탁기를 돌렸더니 당신이 돌아왔네 - 서광일



갑자기 입을 맞추는 바람에
옥상에 떨어진 남의 집 속옷처럼 난감했지만
입술 속은 말랑말랑하고 조금씩 침이 고여
이미 오래전부터 흠모해 왔던 사람인 것처럼
당신의 깊은 추궁이 실린 포옹을 내버려 두었네


전혀 안부가 궁금하지 않았는데
부엌 창에 수평으로 밀려온 저물녘 햇살처럼
얼굴을 붉히며 당신은 돌아왔지
야속하겠지만 한 번도 사랑한 기억이 없어
세탁기에서 다 된 빨래를 꺼내듯
무심하게 당신 닮은 것들을 추려 보아도
쏟아져 버린 세제처럼 달려드는 당신


포옹의 크기만으로 시간의 간격을 짐작하기란
무거운 빨래를 견디다 부러져 버린 건조대 같아서
당신에게만 남은 사랑의 물기는 너무 축축해
타액을 나누며 이대로 뒤엉켜 버릴까
집게 빠진 이불처럼 멀찌감치 달아나 버릴까


세탁기를 돌려 놓고 깜박 또 잠이 들까 봐
당신이 덜 마른 채 달려와 내가 어느새 흠뻑 젖을까 봐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파란








아침이 올 때까지 - 서광일



대학 나와 봐야 별 차이 읎으야
얼매나 견디느냐가 문제지
시베리아서 길을 잃거나 태평양을 떠댕겨도
죽고 사는 문제는 여그 아니면 저그니께


좆 빠지게 돈만 쫓아댕긴 것도 아닌디
샤워 허다 심장마비로 훅 가더라도
살붙이 하나 책임질 일 읎으믄
탈탈 털고 떠날 만도 허지 안 그냐


뼈마디는 저린데 지켜보는 이도 없이
전생에 무신 죄를 지었는가 싶다가도
인생 뭐 벨거 있냐
한몫 크게 잡아서 튈 거 아닌 다음에


가방끈 길어 봐야 젠장
분수대로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겄다
아무도 안 지켜 준다 어차피 혼자서
이번 생은 이게 단가 안 돼요 안 돼


편의점 사장은 퇴근도 안 하고
뉴스 채널을 이러저리 돌리면서
계산대 안쪽에 숨겨 둔 소주를 마신다
잔소리는 밑도 끝도 없이 메들리가 되어 가고


도무지 아침이 올 것 같지가 않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산 - 성윤석  (0) 2020.04.21
해변에서 시간 - 김왕노  (0) 2020.04.21
나중에 오는 것들 - 박미란  (0) 2020.04.19
글쎄, 꽃마중은 - 정덕재  (0) 2020.04.19
봄에 홀려 늙는 줄도 몰랐네 - 오광수  (0) 2020.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