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에 홀려 늙는 줄도 몰랐네 - 오광수

마루안 2020. 4. 18. 19:35



봄에 홀려 늙는 줄도 몰랐네 - 오광수



잠깐 봄꽃에 홀려 한눈파는 사이
못 보던 몸이 나를 찾아왔다
꽃 사이에 앉아 마신 술과 봄 냄새
감정 과잉의 날들이 켜켜이 쌓이다가
세포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몸 여기저기 산수유도 피고
흰 목련도 피었으나
봄비를 맞고 주저 앉은 중이다
맑은 수액 다 털린
고로쇠나무의 슬픔이 이런 걸까
팝콘 같던 청춘의 한때는
흥건한 봄에 취해 지워졌다
바라만 봐도 배부르던 자식들은
꽃놀이를 떠난 뒤 소식이 없다
황사바람에 나부끼는 현수막처럼
저 봄꽃이 서러운 건
생이 너무 무르익은 까닭이다
봄이 와도 모른 체 살기로 한다
봄에 홀려 늙는 줄도 모르다니
이 봄이 가면 건망증도 더 깊어져
또 봄을 기다리겠지, 속절도 없이



*시집,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 애지








우리도 꽃처럼 - 오광수



우리도 꽃처럼 피고 질 수 있을까
길고 긴 인생길, 피고 지며 살 수는 없나
한 번은 라일락이었다가, 이름 없는 풀꽃이었다가
가끔은 달맞이 꽃이면 어떨까
한겨울에도 눈꽃으로 피어
동짓날 밤, 시린 달빛과 어우러져
밤새 뒹굴면 안 될까.


맹렬하게 불타오를 땐 아무도 모르지
한번 지면 다시는 피어날 수 없다는 걸
뚝뚝 꺾여서 붉게 흩어지는 동백 꽃잎


선홍빛처럼 처연한 낙화의 시절에
반쯤 시든 꽃, 한창인 꽃이 그립고
어지러웠던 청춘의 한때가 그립네


막 피어난 백목련, 환하기도 해라
그 그늘 아래로 조심스레 한 발씩
저승꽃 피기 전, 한 번쯤 더 피어나서
느릿느릿 고백할 수 있을까
봄바람 가득한 꽃들의 가슴에
사랑한다고 저릿한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단 한번 피었다가 지는 사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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