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목련 - 사윤수

마루안 2020. 4. 17. 19:30

 

 

목련 - 사윤수


너는 사월의 폭설
송이송이 주먹만 한 함박눈이 허공에 가득 떠 있는 벽화야

백 년을 한순간이라 생각하고 눈 감았다 떠봐
그럼 하얀 새떼가 점묘법으로 내려앉아 있는 것도 보여

목련은 나무에 피는 연꽃
꽃이 만발했다는 건 거기 나무 위에
목련존자 한 채가 가부좌 틀고 있는 거라네
언젠가 내가 비틀거리며 나무를 세차게 흔들어
그를 떨어지게 한 적이 있다는데
나는 기억이 없네

멀리서 보면 목련꽃 핀 나무는
그게 아주 크고 둥근 꽃 한 송이야
지난밤 누가 그 꽃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리자
하얀 새떼가 화르르르 날아올랐어
깃을 치며 어둠 속 높이 사라져갔어

이 모든 것이 꽃 너머의 꽃 얘기
당신과 나의 짧고도 긴 해후였으니

어디쯤에서
목련존자는 투덜거리며 일어나 흙을 털고 있겠지
폭설의 꽃잎도 고요히 지고 있겠지


*시집, 그리고,라는 저녁 무렵, 문학의전당

 

 

 

 

 

 

봄날은 간다 - 사윤수


'봄날은 간다'에서
주어는 어느 것인가
봄?
날?
봄날?

봄날은 간다에서 주어는
'간다'이다

삶이라는 뒤숭숭한 선물과 환한 근심이
내내 나를 희롱화며 종용하다가
설핏 꿈인지 모를 걱정을 뒤로하며 가나니
그 예쁜 마로니에 꽃 우듬지에서 홀로 피고 질 때
봄날은 기어이 가고야 마는 일

그런데
봄은 어디로 가는가
누가 가는 봄의
옷소매와 맨발을 보았는가

모진 것,

매화 벚꽃 복사꽃
천지간에 그 꽃잎 단 한 장도 남겨놓지 않고
나 데불고 갔구나
나만 내팽개쳐 두고
뒤도 한번 안 돌아보고 갔구나




# 사윤수 시인은 경북 청도 출생으로 영남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201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파온>, <그리고,라는 저녁 무렵>이 있다.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2018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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