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착각의 연금술 - 윤의섭

마루안 2020. 4. 17. 19:10



착각의 연금술 - 윤의섭



새벽에 처음 들어 본 새소리는 새소리였는지

어둔 밤 가지가 흔들리는 수양버들인 줄 알았는데 수양버들이었는지

얼핏 스쳐 간 얼굴이 그 얼굴이었는지


분명 언젠가 본 장면이고 잠시 뒤 무슨 말을 할지 아는 선견도

이 세상에 대한 건 아니다


원본이 어떤지 알려면 일생을 살아 봐야 한다


물과 불과 흙과 공기로써 나인지

물과 불과 흙과 공기로 나인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게 사람이어서 슬프면 슬프고 싶어서였고 그리우면 그리움이 앞서서였고 그런 감정

없었기 때문에 생기는 고통

대문 앞에서 집배원이 죽은 자를 부르듯 이름을 부르다 조용해진다 부재중 메모를 남겼으므로 나는 어딘가에 재중일 것이다 살아 있다고 느끼다 증명할 수 없다고 느낀다


봄이었고 나는

떨어지는 꽃잎인 줄 알았는데 나비였다



*시집,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민음사








바람 속의 벚꽃 - 윤의섭



이쯤 되면 꽃이 바람을 불러들인다고 봐야 한다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떨어져 내린다

바람을 타고 어디로든 휘날려 가는

제노사이드 인간계에서는 축제라 불리는 화우

화무십일홍의 꿈이란 풍장에 대한 긴 문장을 읽어 주는 일


동화가 끝날 때까지 우린 결코 잠들 수 없어요


자결에 이르도록 외로웠다

만화의 절정을 바람으로 마무리 짓는 저 화사한 종말

바람 속에서 꽃들은 내생을 적는다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점문이지요 잠에서 깨어날지는 아무도 몰라요


살기 위하여 꽃은 바람을 불러들인다

비늘인 듯 바람결을 따르고 구름보다 빠르게 하늘을 뒤덮고

미친 사람 웃는 잇몸처럼 찢어지거나 섬뜩한

혹은 묵묵한 장례의 행렬


그러니까 이건 역사입니다 반복된다고 졸지 마세요


아무도 보지 않는 산 속에서도 꽃은 진다

무서운 일이다






# 전대미문의 코로나 시국에, 바깥에 있는 시간이 줄었다. 덕분에 시집 읽는 시간이 조금 늘었다. 근래 읽은 시집 중에서 이 시인의 시집이 단연 눈에 띄었다. 꽃 피는 봄이여서, 죽기 좋은 계절이여서, 낭송하기 좋은 시여서,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어울리는 시집이다. 반복해서 읽어도 단물이 쉽게 빠지지 않는 시의 전형이다. 시 읽는 봄날이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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