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의 행로 - 박춘희

마루안 2020. 4. 17. 18:59



봄의 행로 - 박춘희



산초 기름을 넣고 무 달인 물로 감기를 다스리던

어머니가 문득 화전놀이 가고 싶다던 사월

진달래가 산마다 붉었다.


꽃나무들도 몸살이 잦아 붉고, 그 사이를 헤매다

어떤 결의에 가득 찬 빛깔로 한순간을 끝냈다.


저렇게 환한 통증이 아무는 봄 그늘에,

애증으로 엉킨 꽃잎들이 뒹굴다 잦아들었다.


입원과 퇴원을 번갈아 하던 뒷집 할아버진

지팡이를 짚고 걸음마를 시작했다.


간혹 꽃 진 나무 그늘 아래 다리쉼을 하며

방금 돋아난 풀잎 같은 얼굴을 했다.


도처에 봄이 깊었다.



*시집, 천 마리의 양들이 구름으로 몰려온다면, 파란출판








눈먼 자의 봄 - 박춘희



실명한 이웃집 여인이

꽃의 성별을 가리듯 꽃을 더듬을 때

흘리는 꽃향기, 얼룩이다.


성난 꽃으로 쓰러진 노을은 여인이 쓰다 남은 저녁이다.

꽃의 심장을 눈에 바르면 여인의 저녁이 환해지겠는가?


여인이 더듬더듬 마을을 한 바퀴 돌 동안 눈두덩 두껍게 내려앉은 어둠.

꽃들의 얼굴이 지워지고 씨방에 고인 검은 눈물이 기어 나오는 시간이다.


초저녁잠에 깨어난 애장 터 붉은 산나리꽃이

청미래 넝쿨 숭숭 뚫린 의심 많은 눈을 지우고 마을 쪽으로 고개를 든다.

저 애린 폐허를 딛고 맹인의 저녁이 온다.


얼룩으로만 감지되는 시력 하나로

쌍둥이를 키워 내고 밭을 매고

풀물이 밴 발꿈치로 쓰러지는 저녁이 있다.


가장 밝은 꽃도 결국은 얼룩 한 점으로 사라진다.


쌍둥 어멈이 다녀간 뒤

모든 꽃은 저녁의 얼룩이다.






# 박춘희 시인은 1957년 경북 봉화 출생으로 한경대학교 및 동 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시와 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천 마리의 양들이 구름으로 몰려온다면>이 첫 시집이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목련 - 사윤수  (0) 2020.04.17
착각의 연금술 - 윤의섭  (0) 2020.04.17
내일의 예감 - 박일환  (0) 2020.04.17
바닥에 대하여 - 조현정  (0) 2020.04.16
현무암 각질 서비스 - 김요아킴  (0) 2020.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