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일의 예감 - 박일환

마루안 2020. 4. 17. 18:52



내일의 예감 - 박일환



한창때라고 자랑에 빠진
꽃아
언제 질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나를 향해
태연하게 웃고만 있는
꽃아

네가 네 웃음에 속을 수도 있음을
잊지 마라
네가 꽃이었던 시간보다
더 길고 지독한 상실의 시간이 널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온단다
그 순간은 생각보다 빨리 와서
당황할 수 있으니
꽃아

네 발밑을 내려다보아라
네가 지는 날
벌과 나비는 너를 찾지 않을 것이고
​네가 가게 될 곳은
저기 높고 푸른 하늘이 아니라
소란이 바람처럼 몰려다니는
여기 흙바닥일 테니
조용히 네 발밑을 보아두거라

여전히 철모르는 꽃아
방긋 웃고만 있는 꽃아
근심 걱정이 네 일은 아닐지라도
지상의 삶은 웃음보다 눈물이 많은 법
오늘도 먼 곳에서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진 목숨들이 있었다는구나


그러니 꽃아
등불보다 밝은 네 웃음을 자랑하기 전에
슬쩍 너를 건드리고 간 바람이 전해준
내일의 예감을 읽어라



*시집, 등 뒤의 시간, 반걸음








봄꽃 지던 날 - 박일환



어릴 적 나는 새총 잡이 선수였다
콩알만 한 돌을 새총에 걸어 날리면
조고만 참새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내리곤 했다


겨냥하던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과
명중시켰을 때의 짜릿한 쾌감!


생생함에 비해
숨이 끊어진 참새의 눈이라든지
이제 막 멈춘 심장의 온기 같은 건
흐릿하기만 하다


내가 참새 사냥을 즐겼다는 기억을
오래도록 잊고 살았다
기억에서 멀어졌으므로 괴롭지도 않았다


대체로 평온한 삶을 누리는 동안
자연스레 머리칼 허연 중늙은이가 됐는데
무심히 눈을 깜박이던 어느 날
참새잡이 하던 시절이 떠오르고
죄의식 없이 살아온 시간들이 미워졌다


봄꽃 지는 사월 한낮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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