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닥에 대하여 - 조현정

마루안 2020. 4. 16. 22:28



바닥에 대하여 - 조현정



바닥은 달팽이보다 깊더란 말이지

기어다니는 것들의 먹이보다 깊더란 말이지

살고 싶어 맨살 비비는 데더란 말이지

몸뚱이가 곧 말씀이더라는 말이지


아, 우리

그건 이불처럼 시시한 모순이지

내 사랑이 추울까봐

바닥에 몸을 둥글에 말고 울지

울다 엎드려 텔레비전을 켜면

텔레비전엔 늘 무언가 재방송되고

사랑을 나누는 동물이나 가시 달린 꽃나무들

피 터지게 싸우는 인간들의 사랑이거나

요동치다 단내 나는 절정들만 있지


바닥은 눌은 자국이지

부럽다는 말을,

눈물에 손가락을 찍어 바닥에다 써보는 그런 날이 있지


그러면 나는

청록의 물그림자 너울대는 해초숲을 헤엄쳐

심장이 터지도록 튀어오르곤 하지

물방울 바닥을 딛고



*시집, 별다방 미쓰리, 북인








그 저녁의 눈물 - 조현정



오지 말아야 할 저녁이 오고 말았다 시간은 가장 깜깜한 칠흑의 밤하늘을 바다 위에 뿌려놓았다 집어등 불빛이 꽃처럼 피어 있을 뿐 물 위를 떠도는 사람의 빛은 바다 속에 붇혀 있는 생의 기억을 가볍게 핥고 있었다


사랑한다, 더 이상 수신되지 않는 그 말을 베어물고 바다 마저 밤새 앓는 소리를 내는데 이 컴컴한 나라는 엄한 데 불 밝히고 앉아 별스럽지 않은 저녁식사를 하며 낮에 있던 홍해의 기적에 대해, 바다를 가르고 아이들이 줄지어 걸어 나오더란 이야기를 실화처럼 떠들고 있었다


나처럼 밤이 무서워 늘 형광등을 켜고 자던 아이도 있었으리라

아,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


커다랗고 까만 마이크를 쥔 무대를 향해 아이들과 함께 죽은 산사람 하나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두 손 모아 빌 때, 오지 말아야 할 저녁은 애초부터 없었다고 역사의 한편이 소곤대는 것을 들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저절로 눈물이 떨어지는 저녁이 있었다






# 조현정 시인은 1971년 강원도 춘천 출생으로 강원대를 졸업했다. 2019년 <발견> 여름호에 <붉은 낮잠>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2019년 춘천시문화재단 문화예술지원금을 받았다. 강원민예총 문학협회장 및 춘천지부 문학협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시문>, <A4>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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