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눈과 도끼 - 정병근 시집

마루안 2020. 4. 6. 21:35

 

 

 

예전에 조용필 신곡을 손꼽아 기다린 시절이 있었다. 노래가 나오자마자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반복해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진다는 말을 요즘은 쓰지 않지만 카세트 테잎으로 노래를 들었던 사람은 이 말을 안다.

정병근 시인이 10년 만에 시집을 냈다. 실로 오랜 만이다. 조용필까지는 아니어도 언제쯤 시집이 나오려나 기다렸던 시인이다. 이따금 뉴스를 검색하며 출판 동향란에 행여 그의 시집 소식이 있으려나 찾아 보기도 했다.

잊혀질 만하니 시집 소식이 들렸다. 사랑도 오래 떠나 있으면 마음에서 멀어지기 십상이듯 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꾸준한 작품 발표와 시집 내기가 중요하다. 1962년 출생인 시인은 이제 겨우(?) 네 번째 시집을 냈다.

시인도 나이를 먹어서일까. 이번 시집 약력에서는 출생년도가 지워지고 없다. 연예인뿐 아니라 누구든 가능한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이인 모양이다. 그것이 굳어지면 나이 먹었다기보다 늙었다는 증거다.

몰라도 될 시인의 나이건만 굳이 나이를 들먹거리는 것은 애인 나이는 몰라도 시인 나이는 알아야겠다는 못된 심보 때문이다. 읽는 시를 온전히 내것으로 만들기 위함이기도 하다. 기본적인 시인의 약력을 알고 읽으면 공감력이 배가 된다.

어쨌든 이번 시집에도 좋은 시가 많아서 기다린 보람이 있다. 군더더기가 줄어 들어서 담백해진 시가 여럿 눈에 띈다. 오랜 탈고 끝에 助詞를 붙였다 뗐다 했거나 어휘 위치를 바꾸거나 지우며 다듬은 작품임을 느낄 수 있다.

내 상처 때문인지 이런 문구에 무너진다. <자주 미끄러지고 어긋나더니 아주 어긋나서 오래 잃고 뒤늦게 안 보여서 운다>면서 <내 눈이 가는 곳에 있지 마라>고 한다. <눈에 띄는 것은 좋고도 슬픈 일>이니, 이 얼마나 절절한 고백인가.

말미에 실린 평론가 김진수의 해설을 빌리면 시인의 시 세계는 눈(目)이나 보다 같은 시각적 표상과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방금까지 내가 있던 방을 밖에서 다시 내가 들여다 보는 느낌이 든다.

해설이 그냥 건너 뛰는 사족이거나 시 읽기에 방해가 될 때가 많은데 김진수의 해설은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단 시를 다 읽고 나서 읽었기에 그렇다는 거다 . 시가 온전히 내 것으로 다가올 때 해설도 공감이 가기 마련이다.

시인이 워낙 과작을 하는 터라 몇 년 안에 다른 시집을 만날 것 같지는 않다. 만나자 이별 생각 하듯 새 시집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천상 귀한 간식 먹듯 아껴 가면서 읽고 잠시 잊었다 만나는 수밖에 없다. 모쪼록 시를 다듬는 시인의 펜과 정이 무뎌지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