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 윤의섭 시집

마루안 2020. 3. 30. 19:33

 

 

 

윤의섭 시인을 알게 된 건 언제였을까. 아마도 네 번째 시집인 <마계>였지 싶다. 싶지라고 하는 것은 이 시인을 뒤늦게 알았고 그 시집을 읽으면서 이 시인의 정서가 나와 너무 닮았다는 소름에 일부러 멀리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또 나의 시 읽는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고 중구난방인 것도 한 이유다. 어쨌든 가능한 멀어지려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저곳에 필사해 옮겨 논 그의 시가 꽤 되는 걸 보면 윤의섭 시에 대한 끌림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저수지에 빠져 죽은 내 친구 몽연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시들이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의 시를 읽지 않았다. 읽지 않았다기보다 아껴두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누군가 슬픔도 아껴 먹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래 전에 발표한 그의 시 <터미널>과 <바람의 뼈>를 좋아했다. 많은 시를 읽기보다 좋은 시를 여러 번 읽는 내 습관 때문에 자주 읽으니 몇 구절은 저절로 입에 붙었다. 희한하게 그의 우울한 시를 읽고 나면 마음이 맑아졌다.

천성이 어둡기에 그럴 것이다. 나는 노래도 영화도 시도 슬픈 것에 마음이 간다. 역설적이지만 어둠은 나의 본성이자 기쁨이기도 하다. 이것은 내가 일부러 선택한 것이 아닌 어머니가 물려준 유전자다. 어머닌 유행가도 무조건 슬퍼야 한다고 했다.

윤의섭 시는 유독 두 자로 된 제목이 많다. 예전에도 그랬는데 이번 시집에도 두 자 제목은 여전하다. 달라진 점은 漢字로 표기했던 것을 불가피한 경우 빼고는 한글로 바뀐 것 뿐이다. 漢字로 표기된 그의 두 자 제목은 이해도가 저절로 높아졌다.

이번에도 그의 특기(?)인 죽음에 관한 시가 많다. 한국에 이렇게 죽음을 통렬하게 꿰뚫면서 고급스럽게 표현하는 시인은 없다. 시집을 내는 주기도 일관성이 꾸준하다. 이번이 여섯 번째 시집인데 4년과 비슷한 5년 터울이다.

다작도 아니고 과작도 아닌 가장 무난한 시집 내기라고 본다. 너무 기계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나는 올림픽 주기를 가장 적당한 시집 내기라고 생각한다. 시쓰기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꾸준함이 어렵다.

그의 시는 발표도 꾸준하지만 시 품질 또한 들쑥날쑥하지 않고 고르다. 그렇다고 같은 궤도를 도는 것도 아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수성부터 화성 지나 지금은 목성쯤 돌고 있는 행성처럼 보인다. 이번 시집에 실린 <행성의 새벽>을 읽다 든 생각이다.

그의 시는 미친 듯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달이 보이지 않는다고 달이 지구를 떠난 건 아니다. 달은 지금도 내 주변을 돌고 있다. 그의 꾸준함과 단단한 시적 영토로 봐서는 앞으로도 서너 개의 행성은 거뜬히 만들어 돌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어디까지 그를 따라 갈지는 모른다. 비록 이정표가 나올 때마다 바뀔지라도 오래도록 따라 가고 싶은 시인임은 분명하다. 어둠을 물려 준 내 어미와 문자를 깨우쳐 준 초등학교 양미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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