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꽃구멍 - 이봉환​

마루안 2020. 3. 29. 21:13

 

 

꽃구멍 - 이봉환


우리 눈에는 그저 언젠가

때가 되면 피는 것이겠지만 동백에게는
얼마나 많은 힘이 끙, 끙, 필요했던 것일까
가지 끝의 여린 눈으로 꽃잎을 밀어내려
애쓴 흔적이 꽃봉오리 붉음에 스며 있네
때가 되면 우리 마음에도 봄이 오가고

또 당연히 그러는 것이겠지만 저들의 삶은
저리 안간힘이네 겨우내 동백은 잠 한숨 못 잤을 것이리
푸르던 잎이 거뭇거뭇해진 것 좀 봐! 똥 누듯 힘쓰느라

시퍼레진 저 낯빛을 좀 보라구!

어머니에게서 내가 나왔네 그 구멍들에서 나온,

너무나도 커다랗게 자라버린 저잣거리의 저놈들을 좀 봐!
밀어내느라 애쓸 만한 저 꽃들을 좀 보란 말이야!

 

 

*시집, 응강, 반걸음

 

 

 

 

 

 

내 귀하고 늠름하고 어여쁜 - 이봉환

 

 

어쩌다가 내가 나로 태어나서

어느 곳을 흐르다가 한 귀한 여자를 만나고

저것들, 어쩌면 늠름하고도 어어쁜 저것들은

내 자식으로 운명(運命) 하여 왔을까

 

 

 

 

*시인의 말

 

작년엔가, 재작년부터였나?

무슨 생의 매듭이 하나 툭 풀려 내렸다.

 

이제 나는 내 시는 제어할 틈도 없이 막 나갈 것 같다.

그것이 어딘지는 무언지는 나도 잘 모른다.

과연 응강에서 오래 멀리 벗어난 일일까.

 

그게 어디 그리 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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