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칼 가는 노인 - 백성민

마루안 2020. 3. 28. 19:12

 

 

칼 가는 노인 - 백성민

 

 

밤새 뒤척이던 몸을 일으켜

서둘러 낯을 씻는다.

아직은 이른 봄,

시린 손끝으로 어젯밤 아내의 한숨 소리가 파고든다.

 

밀리고 쫓겨 올라앉은 산동네

높은 것도 복일까

해마다 올려달라는 월세금은 냉수 한 사발을 부르고

쫓기듯 쪽문을 나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골목마다

이른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웨딩샵 쇼윈도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눈꽃 같은 드레스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침침한 눈으로 살펴본다.

 

아무리 셈을 해도 알 수 없는 숫자다.

칼 한 자루 날을 세워야 고작 삼천 원 오천 원인데

옷 한 벌의 가격만큼 날을 세운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

 

아하! 여기는 강남이요 압구정이란다.

 

 

*시집/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문학의전당

 

 

 

 

 

 

해도(海道) - 백성민

 

 

그의 하루는 칼을 가는 일로 시작된다

새벽이 거침없이 밀려오던 날

우리 숨을 죽였던 안개비가 몸부림을 쳤고

수삼 년을 손에 익은 칼은 손 안에서 겉돌았다

 

등 푸른 생선이 유난히도 많이 잘려지던 한낮

그의 손톱 밑으로 어느 물고기의 가시인지 모를

은밀함 하나 숨어들었고

칼질을 할 때마다 들어 올린 손 안에서는

먼 바다에서 보내는 해독할 수 없는 암호가

세상을 향해 퍼져 나갔다

 

피조차 흘릴 수 없고

외마디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직각의 오후

먼 바다를 향해 기치를 세웠던 날렵한 지느러미는

변방의 그늘 속으로 숨어들고

탄식에 멱을 잡힌 늙은 청춘들이 취기를 안고 쓰러진다

 

불현듯 가슴 아래로 송곳 끝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퇴화의 길을 걷는 고래의 물숨 자리가 내뱉는

오래된 기억 저 아득함 속에서

 

 

 

 

# 백성민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1980년 <청담문학>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이등변 삼각변의 삶>, <죄를 짓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워킹 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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