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때 늦은 낫질 - 최정

마루안 2020. 3. 29. 22:12

 

 

때 늦은 낫질 - 최정


긴 폭염에 갇혀
밭둑 낫질은 엄두도 못 냈다

때 늦은 낫질은 힘에 부친다

단풍이 발자국을 찍으며
성큼성큼
한 걸음씩 내려오는

가을,

계곡 아래까지
가을빛이 그득하다

심장의 피를 뽑아
마구 뿌려 놓은 것처럼
붉은 단풍이 발길을 잡아끈다

낫을 던지고
아예 밭둑에 앉아 버렸다

야속하게 그리 서둘러
붉어질 일이냐

그리 아름다운 비명 지를 일이냐

첫눈에 물들어 잊히지 않는 사랑도 있더라


*시집, 푸른 돌밭, 한티재


 

 

 

빛 - 최정


골짜기 끝에서 환한 빛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홀로 늙어가도 서럽지 않을 만큼
아늑했다

첫해 농사를 짓고서야 알았다

환한 빛의 정체는
밭 전체를 덮었다 노랗게 마른
바랭이 풀

초보 농부를 비웃듯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고
집요하게 밭을 점령해 갔다

뽑다 지쳐 콩밭이 아예 풀밭이 되었다

풀더미 속에서
용케 여문 단호박을
보물찾기 하듯 발로 밟아 찾아냈다

그렇게 첫해가 지나고
노랗게 마른 풀빛이라도 좋았다

홀로 늙어가도 서럽지 않을 만큼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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