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날개 없는 새 - 윤병무

마루안 2020. 3. 27. 18:47



날개 없는 새 - 윤병무



일이거나 술이었던 시절이었다
혼자 야근하는 마술사를 엿보았다
마술사는 비둘기 날개를 이발했다


멀리 날 수 없는 흰 새들
회전목마처럼 마술사를 맴돌았다
폼 나게 차안을 뜰 수 있는 묘수였다


겨울에 우는 비닐봉지 같은 날이면
새 없이도 생각했다
가위 같은 설산(雪山) 봉우리를,


희디흰 모서리에 서서
마술사 손이 놓은 트럼프처럼
종막의 카드를 튕기고 싶었다


중요한 것은 죄다 종이에 있었다
빳빳한 종잇장처럼 하강하며
미지막 패를 까뒤집고 싶었다


날개 없는 새가 곤두박질쳤어!
땅에 뭘 두고 왔나 봐!
목격자 새가 무심코 진실을 말해버릴까


이발당한 비둘기처럼 생각만 맴돌았다
슬퍼할 사람 몇 안 되는 지상을 걸었다
설산의 목격담이 예언을 미리 들었다



*시집, 당신은 나의 옛날을 살고 나는 당신의 훗날을 살고, 문학과지성








조문 - 윤병무



실패를 거듭할수록 꽃은 만개했다
봄은 채색의 균형을 맞췄다
매화와 산수유가 환호하는 거리를 지나
뒤늦게 알게 된 처소에 당도했다


쉬쉬하던 사람들은 근접하지 않았던
처소를 까맣게 모른 채
두 번의 봄이 오도록 나는
매일 밤을 이고 있었다


최후의 살림이 그대로인
처소는 몇 해째 함구하고 있었다
검은 꽃이 핀 유리문을 누가 닦아놓았다


근거도 없이 믿은 문 앞에
탁주와 명태를 내려놓았다
애도와 겁을 모아 잔을 채우고 절했다
봄을 대신해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달린 줄 몰랐다고
이젠 종다리처럼 날아오르라고


정작 하고 싶었던 말
부디 떠나달라려다가
이배(離杯)를 마셔버리고 서둘러 떠났다
불편한 길에서 만난
적요한 두견화에게도 다복한 매화에게도
그날의 조문은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긴 봄이 다시 와도 꽃은 슬펐다
소문을 내면 떠날지 몰라
조용히 귀에 옮겨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이제는 안다
슬픈 사연은 사연이 슬플 뿐
꽃이 기쁘고 슬픈 이유는 아니라는 걸
그럼에도 가여운 망인을 탓했다니





시인의 말


빚꾸러미가 되어 주야장천 걸었다.
맨정신으로는 산문을 걸었고,
제정신으로는 시를 걸었다.
당신을 갚을 날이 아주 멀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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