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문래동 마치코바, 이후 - 황규관

마루안 2020. 3. 27. 18:53



문래동 마치코바, 이후 - 황규관



전기도 기계도 부족한 때가 있었다
그 대신 불거져나온 힘줄과 헐렁한 눈빛과 단출한
생활이 있을 때였다 멀리 있는 사람들 향한
그리움이 무성한 때가 있었다
돈도 일할 사람도 모자라 혼자 공장 문을 열고
쇠를 자르고, 붙이고, 깎고, 조인 다음
온 근육을 모아 낡은 짐차에 실어보내던 때가 있었다
가난이 어쩔 수 없이 공유되던 시절, 버려진 것들을
얼기설기 엮어 다른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석양이 공장 문을 찾아오면 고단한 밤일을
맞아야 했던 날도 있었다
현재는 언제나 유토피아를 배반한다지만, 우리는
그 서러운 시대를 너무 쉽게 버리고 떠났다
바깥으로 떠났으나 더 어두운 안이었고
희망을 향해 떠났으나 시간은
한 걸음씩 증발해버렸다
문래동 마치코바,
이후로 가난이 노래가 될 수 있는 길은 끊겼고 들판 대신
빼곡한 빌딩과 아파트 숲만 자랐다
부동산 입간판만 풍성해졌다
이제 작은 고통을 질 힘도 사라졌다
너무 부유하나 너무 궁핍하고
너무 거대하나
모래알보다 작아졌다



*시집,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문학동네








호미 - 황규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풀을 매고 흙덩이를 부수고 뿌리에
바람의 길을 내주는 호미다
어머니의 무릎이 점점 닳아갈수록
뾰족한 삼각형은 동그라미가 되어가지만
호미는 곳간에 쌓아둘 무거운 가마니들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가난한 한 끼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저물녘까지 몸을 부린다
인간은 모두 호미의 자식들이다
호미는 무기도 못 되고 핏대를 세우는
고함도 만들지 않는다 오직
오늘이 지나면 사라질 것들을 가꾼다
들깨며 상추며 얼갈이배추 같은 것
또는 긴 겨울밤을 설레게 하는
감자며 고구마며 옥수수 같은 것들을 위해
호미는 흙을 모으고
덮고 골라내며 혼잣말을 한다
그러다 혼자돼 밭고랑에서 뒹굴기도 한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호미야말로
인간의 위대한 이성을 증명하지만,
산 귀퉁이 하나 허물지 않은 그 호미가
낡아가는 흙벽에
말없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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