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에게로 가다 - 김사이

마루안 2020. 3. 20. 21:38



너에게로 가다 - 김사이



이른 봄날

어미의 팔짱 꼭 끼고 나들이 간다

동백꽃 흐드러지게 핀 미황사에 간다


법당에 들어선 어미의 두 손이 하늘을 받들어

늙은 소처럼 살아온 시간이

지긋지긋해 도망갈 수도 있었으련만


등을 타고 엉덩이로 흘러가는 골 깊은 길

사랑이 탱탱하게 둥글 때가 있었을 테지

예기치 못한 새끼가 발목을 잡았을까

미련 없이 떠나지 못한 어미의 속내를

끝내 알 수는 없으나


등이 바닥과 하나가 되어

오체에서 푸른빛 안개가 피어올라

어미를 열고 세상으로 걸어나오는 무한한 새끼들

열린 구멍으로 늙은 아기 들어가신다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창비








가끔은 기쁨 - 김사이



검은 얼룩이 천장 귀퉁이에 무늬로 있는 것

곰팡이꽃이 옷장 안에서 활짝 피어 있는 것

갈라진 벽 틈새로 바람이 드나드는 것


더우나 추우나 습한 부엌에서 벌레랑 같이 밥 먹는 것

화장실 바닥에 거무스름한 이끼들이 익숙한 것

검푸른 이끼가 마음 밑바닥을 덮고 있는 것

드러나지 않고 손길 닿지 않는 곳에

끈적끈적함이 붉은 상처처럼 배어 있는 것

삶 한켠이 기를 써도 마르지 않는 것


바람 한점 없이 햇볕 짱짱한 날

지상의 햇살 모두 끌어모아

집 안을 홀라당 뒤집어 환기시킬 때면

기름기 쫘악 빠진 삶이

가끔은 부드러워지고 말랑말랑해져

고슬소슬해진 세간들에 고마워서

그마저도 고마워서 순간의 기쁨으로 삼고

또 열심히 살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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