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람 그리는 노래 송승언

마루안 2020. 3. 19. 22:41

 

 

사람 그리는 노래  송승언


정원으로 이어지는 여러 갈래의 길에는
신도들이 늘어서 있고 신앙심을 시험하려는 듯이
줄줄이 대기열을 만들고 혀를 내밀고 있다
혀끝에서 신속히 흩어지는 것
없었던 듯 새겨지는 것
그것을 위해 나는 항상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낯가죽을 새롭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혀를 내밀며 드는 생각은 이것
나는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여러 갈래의 길로 이어지는 정원에 서서
향나무의 뒤틀림에 경탄했다
저렇게 뒤틀릴 수만 있다면
개발 중인 신도 두렵지 않을 텐데
비늘조각이 육질화 된 향나무를 보며
향나무 좋지.... 나도 좋아해
말씀하시던 신부님은 맥주 마시러 갔고

나는 이제 내 팔다리의 멀쩡함을 입증하기 위해
뇌에 대타격을 입은 사람의 말을 빌려 쓴다
탁구 하던 사람
술집 하다가 망한 그 사람

종이 울리면 슬프지는 않았다
신앙을 잃은 사내아이의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마지막으로 만지고
또 냄새 맡았던 전도서의 겉표지 냄새


*시집, 사랑과 교육, 민음사


 

 



기계적 평화 - 송승언


공원 벤치에 앉아 크림빵 먹는 남자에게
다른 남자가 다가와
단팥빵 하나 건네주는 풍경

공원벤치에 앉은 두 남자가 빵 먹는 풍경을
개가 침 흘리며 바라보는 풍경
말없이

세상 망하고
잠자다 깬 사람 다시 자도 되고
듣기 싫은 음악 안 들어도 되고
그럴 때까지

인생이 섬망이라 여겼던 사람이 섬망에서 해방될 때까지
영혼 없어서 영혼 없는 말도 없고
말 없어서 없는 영혼도 없을 때까지

공원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까지
인류의 무덤이 기념품 같을 때까지

말없이 두 남자가 크림단팥빵을 먹고 있고
개의 영혼이 침 흘리며 이탈하고 있다


 


# 송승언 시인은 1986년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1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철과 오크>, <사랑과 교육>이 있다. 박인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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