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남도의원 - 현택훈

마루안 2020. 3. 18. 19:12



남도의원 - 현택훈



바닷바람은 수평선에서 불어올까
푸른 알약이 쏟아진 듯한 바다


낡고 야윈 사람들은
원고지 한 칸 같은 병실에 들어가
비로소 슬픔을 분양받는다


더는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으러
남도의원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바다가 보이는 의원에서
약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이 있다


병원에서 겨울을 나면
얼굴이 눈사람처럼 하얗게 될 것이다


수평선 너머에는 어린 바람이 머물러 있을까


부근에 염전이 있었다고 하지만
공기에 남아 있는 소금기가
손톱만큼 남은 상처 부위에 얹힌다


오래된 병원
장기 입원 환자들은 자신의 병과 오래 사귄다


한 보름이나 한 달
남도의원에 입원하여
소원해진 병들의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다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걷는사람








감산리 경유 - 현택훈



시외버스가 하루에 두 번 지나가는 감산리
내리거나 타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도(道)에서 감산리 경유 노선을 폐지한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버스가 구릉이 있는 길로 들어서자
평평한 도로인데 몇 번 덜커덩거립니다


바위그늘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정류장
오늘은 웬일일까요
돌하르방이 버스에 올라탑니다
노루가 귀를 쫑긋 세우고서 들어옵니다
참새가 열린 차창으로 들어옵니다
반딧불이도 들어옵니다
알락하늘소도 들어옵니다
난리 때 인민유격대 대원이었던 사내가
제사 지낼 식구도 없는 감산리에 들렀다가
버스에 시적시적 올라탑니다
흙 묻은 옷 더벅머리 사내는
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대어 낯선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그 노래를 받아적고 싶지만
축축한 물기운이 버스에 가득 차서 그만둡니다
사내의 바지에 붙어 따라온 환삼덩굴이
줄기를 뻗어 시외버스 속을 가득 채웁니다


어느새 버스는 만원입니다
이 많은 것들이 모두 버스에 타느라 정작
읍내 오일장에 가려는 서동 묵은터 할머니는
버스를 타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버스 정류장 근처 점방에 가서 화투를 칠 것입니다
손님이 오는 날인가, 매화가 더욱 붉다며 패를 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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